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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방인디출판/예수 컨설팅-포스트꼰대니즘의 전도

[예수 컨설팅] 제7장-메타노이아!

by 마음의제국 2020. 7. 14.

Leonardo Da Vinci-Salvator Mundi

 

 어린아이가 성장한다는 것은, 사랑을 줄 수 있는 존재가 된다는 것이다. 

 

가장 일반적인 방식으로 
사랑의 능동적인 성격을 말한다면
사랑은 본래 주는 것이지
받는 것이 아니라고 설명할 수 있다.
<에리히 프롬-사랑의 기술>

 

다시 한번 말하지만
사랑은
'사랑을 받는 것'이 아니다.
'사랑을 하는 것'이다.
무엇인가를 주는 것이 사랑이지,
받는 것이 사랑은 아니다.
<샬롯 카시라기, 로베르 마조리
-그 마음의 정체>

 

 미움은 어디서 생겨나는가? 미움은 사랑을 ‘받으려 하는 태도’에서 생겨난다. 사랑을 줄 수 있을 만큼 성장하지 못한 자들은, 사랑을 받으려고만 하고, 받지 못해 삐치고, 미워하고, 혐오한다. 

 

 사랑은 영혼의 힘이다. 사랑은 머리로 할 수 없다. 이것저것 비교하고 따지는 것은 ‘거래’지, ‘사랑’이 아니다. 영혼의 힘이 있어야만 사랑을 줄 수 있고, 다른 사람을 주는 자로 깨우며, 사랑을 되받을 수 있다.

 

 사랑을 받으려는 태도는 내면의 욕심이, 양심보다 큰 상태를 의미한다. 아이의 성장 과정은, 영혼의 힘이 축적되는 과정이다. 내면의 빛이 어둠을 찢고 터져 나오는 과정이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양심이 욕심을 경영할 수 있게 되면, 사랑을 ‘줄 수 있는’ 개인으로 거듭난다. ‘어린-아이’가 성장 과정을 거치면, 늙은-아이 (즉, ‘성숙한-아이’)로 거듭난다. ‘늙은-아이’는 계속해서, 생명의 길로 나아간다.  

 

 ‘어린-아이’가 성장 과정을 제대로 거치지 않고, 나이만 먹으면, -늙은이 (즉, ‘유치한-꼰대’)가 된다. 욕심으로 마음이 굳어져서 내면의 빛이 터져 나오지 못한다. 어둡고 죽어가는 존재가 된다. ‘애-늙은이’는, 죽음의 길로 접어든다

 

 욕심(즉, 야성)은 사자로 표현된다. 양심(신성)이 커져서 사자(야성)를 통제할 수 있어야, 생명의 길로 나아갈 수 있다. 양심이 욕심을 경영할 수 있어야, 사랑을 줄 수 있는 온전한 개인으로 거듭날 수 있다. 영혼의 힘을 키워, 내 안의 사자와 싸워서 이기는 과정이, 성장 과정이다.


사람이

사자를 잡아-먹어서  

사람이 되는 것은 

축복받을 일이고,  

 

사람이

사자에게 잡아-먹혀서  

사람이 되는 것은 

저주스러운 일이니라.

-예수(도마복음 7절)


 ‘-늙은이는 사자에게 잡아 먹혀서, 죽음의 길로 접어든 사람들이다. 이들은 욕심만으로 마음이 굳어서, 받기만 할 수 있다. 실제로 받아먹는 것을 좋아한다. 한 치도 줄 수가 없다. ‘애-늙은이’는 존재의 이유를 자신의 내면을 천착하여 발견하려 하지 않고, 외부에서 손쉽게 얻는다. 외부에서 자신에게 ‘주는’ 대상이 존재의 이유가 된다. ‘주는’ 대상을 우상화한다. ‘애-늙은이’는 우상으로부터 ‘물질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받아먹어야 살 수 있다. 물질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배급’ 받아야 연명할 수 있는 이들은, 줄을 서야 잘 살고 있다고 느낀다. 그래서 우르르 몰려다닌다. 자기 영혼이 무엇을 원하는지에 대한 고민은 없고, 우상만 맹목적으로 따른다. 쉽게 선동당한다. 이것을 거지 의식’, 노예 의식이라 한다. 

 

 ‘애-늙은이’가 됨의 문제는, 나이나 세대의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개인 각자의, ‘의식 수준’의 문제이다. 생명의 길로 나아가는지, 죽음의 길로 접어드는지는, 나이를 초월한 각자의 의식 차원의 문제이다. ‘의식 수준’은 ‘연공주의’를 따르지 않는다.


오래 산 노인은

일곱 날 된 아이에게 

기꺼이 생명의 장소가 어디 있는지

물을 것이며

그래서 노인은 살 것이니라

먼저 온 사람들 중 많은 이가

마지막까지 남을 것이며

마침내 하나가 될 것이니라.

-예수(도마복음 4절)


나중에 태어난 사람을 두려워해야 한다
내일을 살아갈 그들이
오늘의 우리보다 못할 것이라고  
어찌 함부로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이들이 40, 50세가 되어서도  
학문과 덕행으로
세상에 알려지지 않으면

두려워할 존재가 되지 못한다.
-공자

 

 사자에게 잡아 먹혀서 죽음의 길로 접어든, ‘애-늙은이’들은, 사랑을 ‘주는 것’에 불구가 된다. 영혼의 힘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에게 무엇인가를 ‘주는’ 대상을 진심으로 사모하지만, 그것은 결코 사랑이 될 수 없다. 확대된 이기심’ 일뿐이다. 확대된 이기심은 ‘맹목적’이고 ‘배타적’이다. ‘애-늙은이’는 ‘확대된 이기심’이라는 짝퉁 감정이라도 부여잡아야, 존재의 이유를 느낄 수 있다. 

 

 ‘군중-떼’의 요소가, ‘애-늙은이’들이다. ‘군중-떼’에게 세상은 투쟁의 장이다. 받아야 살 수 있는 그들의 마음은, 시기와 질투, 미움뿐이다. 그들의 의식은 점점 메마르고 죽어간다. 그들 자신도 죽음의 기운을 느낀다. 두려움을 느낀다. 두려움을 억누르고, 마음의 안정감을 찾으려, 더 우르르 몰려다닌다. 군중-떼의 안전한 울타리 속에서 위안을 얻는다. 울타리 밖 세상을 미워한다. 군중-떼는 혐오 한다. 틈만 나면 마녀사냥을 하며 자위한다. 인간이 영적으로는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직관이 없기에, 공감 능력이 불구가 된다. 이해득실(利害得失)만 따지는 ‘소시오패스’가 된다.

 

본래 사랑은
특정한 사람과의 관계는 아니다
사랑은 한 사람과 
사랑의 한 대상과의 관계가 아니라,  
세계 전체와의 관계를 결정하는 태도’, 
곧 성격의 방향이다

사랑은 활동이며
영혼의 힘’ 임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단지
올바른 대상을 찾아내는 것만이
필요하며

그렇게 되면 그 밖의 일은 모두 
저절로 될 것이라고 믿는다

만일 내가 어떤 사람에게
‘나는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다면, 
'나는 당신을 통해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당신을 통해
세계를 사랑하고,
당신을 통해
나 자신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에리히 프롬-사랑의 기술>
Louis Armstrong - What a wonderful world ( 1967 )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God is Love) 
<요한 1서 4:7~8>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 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예수(누가복음 17:20~21)


 생명의 길()로 나아가려면, 군중-떼에서 벗어나야 한다. 군중-떼에서 벗어나려면, 세상의 흐름에 휩쓸리는 것이 아니라, 자기중심이 서야 한다. 자기중심이 서려면, 자기 내면의 영혼의 소리를 들어야 한다. 그런데, 영혼은 언어를 모른다. 영혼의 소리는, 개념화될 수 없다. 

 

()가 말해질 수 있으면
진정한 도가 아니고 
이름이 개념화될 수 있으면
진정한 이름이 아니다
-노자

 

 영혼의 소리는 개념화 될 수 없기에, 각자의 삶에서 느끼고, 체험해야 알 수 있는 것이다. 참 자아와 합일을 이루는 과정은, 개념화된 목표를 세워놓고 직선적으로 달려 나가는 과정이 아니라, 구불구불 길을 잃고, 넘어지고, 몰락하고, 주입받은 고정관념이 비워지고, 방황하는 과정이다. 


왕국은 마치

백 마리의 양을 지닌

한 목자와 같도다

어느 날 그 양들 중 

가장 큰 양 한 마리가

길을 잃었느니라. 

그러자 목자는

다른 아흔아홉 마리를 남겨두고  

길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을 때까지

찾아 나섰느니라

목자는 힘들여 찾은 후에

그 양에게 말하길

나는 다른 아흔 아홉 마리의 양보다 

더 너를 사랑하노라.’

-예수(도마복음 107절)


 군중-떼들은 자기 내면에 집중하지 못해서, 외부로만 바쁘게 눈알을 굴리기 때문에, 남의 일에 관심이 많다. 군중-떼들은 끊임없이 서로에게 개념화된 것을 정답으로 들이민다. 그들은 현실적인 길을 제시한다. 그리로 우르르 몰려다닌다. 그러나 길이라고 말해질 수 있는 길은, 자기 발견의 길이 될 수 없다. 진짜로 자기 자신의 길이라면, 타인이 아무도 밟아보지 않은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자기의 내면으로 향하는 길의 첫 발자국은, 오로지 자기 자신만이 내딛을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군중-떼가 말하는 길은, 나의 길이 될 수 없다. 

 

 ‘길 잃음’은 ‘자기 발견’ 즉, ‘성장’의 시발점이다. 집단의 안전한 울타리 안에서는 군중-떼가 됨을 피할 수 없다. ‘나는 나(I am who I am)’로 살 수 있는 길을 찾아 나서려면, 두려움을 이기고, 경계로 나아가야 한다. 그것을 넘어서야 한다. 위험(Risk)을 무릅쓰고, 생명의 길로 나아가야 한다. 자기 자신에게 이르는 길을, 스스로 찾아야 한다. 군중-떼에게 끌려 다니는 것이 아니라, 그냥, 거리낌 없이 내 갈 길 가야 된다. 

[M2 Live Edition] 장기하와 얼굴들(Kiha & The Faces) - 그건 니 생각이고(That’s Just What You Think)

 

 


구하는 자는

찾을 때까지 구함을 멈추지 말라.  

그가 찾게 될 때 불안하게 될 것이요

그 불안은 놀라움으로 바뀔 것이며

마침내 그는 모든 것을 지배하리라.

-예수(도마복음 2절)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예수(마태복음 7:7)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예수(마태복음 7:13~14)


고생하여 생명을 발견한 자는

복이 있도다.

-예수(도마복음 58절)


 길 잃는 것은, 혼자됨’을 의미한다. 고독의 무게’를 짊어질 수 있어야만, 변화’할 수 있다. 애벌레가 나비로 변화하려면, 혼자, 번데기라는 고독 속으로 나아갈 수 있어야 한다. 그동안 익숙해진, 땅바닥을 기어 다니는 일상과 단절할 수 있는 결단이 필요하다. 누구도 그 애벌레에게 번데기라는 감옥을 강요하지 않는다. 누구도 그 애벌레가 번데기로 인고하는 시간을 대신해줄 수 없다. 스스로 자기 안에서 터져 나오는 목소리를 살아낼 뿐이다. 혼자될 수 있는 힘은 축적되어, 끝끝내 나비로의 도약을 이루어 낸다. 나비는 번데기를 찢고 나와, 자유롭게 날아오른다. 자유롭게 날아오르려는 자는, 혼자 될 수 있어야 한다.  

TAEYEON 태연 'I (feat. Verbal Jint)' MV

[#리플레이그노래] 하현우의 고음, 故신해철 '해에게서 소년에게' 리메이크 | #이타카로가는길 | #Diggle

 ‘자유’롭게 날아오르려면 역설적으로, 중력의 무게가 필요하다. 근육의 성장이, 무게를 짊어지는 것을 통한, 점진적 과부하의 원리로 이루어지듯, 내면의 성장도, 자신의 운명의 무게를 짊어지는 것을 통한, 카르마에 따른 과부하의 원리로 이루어진다. -피하지 말고 네 운명의 무게를 기꺼이 감당해 내라, 너 자신의 성장을 위하여.-니체의 ‘네 운명을 사랑하라(amor fati)’와 통하는 메시지다. 내 ‘운명의 무게’는, 나 혼자만이 ‘책임’ 질 수 있다. 자유와 책임은 하나다. 책임이 없는 것은, ‘방종’이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예수(마가복음 8:34)


하늘이 큰 임무를
이 사람들에게 내리려고 할 때는, 
반드시 먼저
그 마음의 뜻을 괴롭게 하고, 
그 체력을 힘들게 하며, 
그 육체를 굶주리게 하고, 
그 몸을 빈궁하게 하여,  
일을 할 때도
그가 하려는 것과 어긋나게 만들었고, 
마음을 움직이고
성질을 참게 하여, 
일찍이 해내지 못하던 일을
더 많이 할 수 있게 했다.
-맹자

신이 우리를 외롭게 만들어  
우리들 자신에게로 인도할 수 있는 길은
많이 있다

그런 길을 그때 
신이 나와 함께 갔던 것이다.
<헤르만 헤세 – 데미안>

추위와 더위, 
굶주림과 갈증, 
그리고 바람과 열기와
쇠파리와 뱀, 
이러한 모든 것을 극복하면서,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싯다르타

많은 이들이 문 앞에 서있으나

홀로 된 자만이

신부의 방에 들어 가리라.

-예수(도마복음 75절)


 ‘신부의 방에 들어간다’는 말의 의미는, ‘신성과의 합일’을 의미한다. 즉 자기 내면의 영혼을 발견하여, 합일을 이루는 것을 의미한다. 내가 참 자아가 됨(I am Who I am)을 의미한다. 신성과 야성의 결합을 의미한다. 신성과의 합일은, 홀로된 자만이 이룰 수 있다. 길 잃고 홀로 될 수 있는 용기가 있는 자만이, 사랑을 할 수 있는 개인’으로 거듭날 수 있다. 사랑을 할 수 있는 개인 자기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God=I am=Love).


자기 자신을 발견하는 사람은 

누구나

이 세상보다 위대하다.

-예수(도마복음 111절)


 군중-떼를 벗어나 길을 잃고, 혼자되고, 구하고, 운명의 무게를 짊어지고, 자기를 발견하는 과정이, 성장 과정’이다. 성장할 수 있는 개인만이, 사랑을 할 수 있고, 사랑을 할 수 있는 개인만이, 성장할 수 있다. 사랑’과 ‘성장’은 선순환한다.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자신의 결점과 싫은 부분을
상대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노력한다

이것은 허영심이 아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려는 것이다

그리고 상대가 언젠가 그것을 눈치채고
혐오감을 느끼기 전에
어떻게 해서든
자신의 결점을 고치려 한다

이렇게 사람은 좋은 사람으로
마치 
신과 닮은 완전함에 다가가는 인간으로 
성장해 나갈 수 있다
.
<니체 - 즐거운 지식>

무서운 것이 내게는 없소
누구에게 감사받을 생각 없이
나는 나에게 
황홀을  
느낄 뿐이오
나는 하늘을 찌를 때까지  
자라려고 하오
무성한 가지와 그늘을  
펴려 하오.
<김광석-나무>
김광석-나무

 성장은 변화를 수반한다. 변화는 자신을 특정한 모습으로 완성하지 않고, 안주하지 않으며, 새로운 나를 창조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성장은, 창조로 이어진다. 

 

 새로운 나를 창조한다는 것은, 기존의 나를 객관적으로 관찰하여, 벗겨내야 할 허물을 과감하게 벗어내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솔직하게 성찰하여, 개선해 나갈 수 있는 지혜를 갖추는 것이다. 이러한 지혜는 허물을 벗고 거듭나는 존재인 뱀으로 상징된다.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예수(마태복음 10:16)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한 자만이, 생명을 지지할 수 있다. 자기 자신을 넘어서 창조할 수 있는 자는, 다른 생명도 지지할 수 있을 만큼, 영혼의 힘이 큰 자이기 때문이다. 영혼의 힘이 넘쳐흐르면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자기 이외에 어떤 것을 창조할 수 있게 된다. 

 

 ‘보이지 않는 손’은 생명을 지지한다. 생명을 지지하는 모든 행위가 진정한 의미의 창조이고, 진정한 의미의 창조는, 생명에 의해 지지 받는다. 

 

 요약하자면, 창조는 영혼의 힘이 충분히 축적되어 흘러넘칠 때 이루어지는 것이다. 충만해진 영혼의 힘이, 보이지 않는 손을 움직여, 하고자 하는 마음(욕심)’을 도구로 사용할 때, 창조가 이루어진다. 그래서 창조를 불러일으키는 에너지를 영감(靈感, 영적인 존재를 오감으로 느낌)이라고 한다. 

 

 ‘영감’은, 사랑을 줄 수 있고, 스스로 성장할 수 있는, 온전한 개인’에게 주어지는, 신의 선물이다. 영감의 힘을 통해 창조할 수 있는 ‘온전한 개인’은, 창조주의 대리인’이다. 창조주의 대리인을, 천자(天子, 하늘의 아이)’, 즉 ‘왕’이라고 한다. 신은 이러한 대리인을 통하여 역사한다. 신은 자기를 발견하여, 주인으로 거듭난 개인들을 통해 역사한다. 

 

영혼의 본질은 영원이며, 
그 본질을 우리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그 본질은 대게  
사랑하는 힘 창조력으로 
우리가 느낄 수 있도록 주어진다.
<헤르만 헤세-데미안>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

그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어떻게 그리 되는지를 

알지 못하느니라.

-예수(마가복음 4:26~27)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때를 

알지 못하느니라

 

(천국은또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 때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

각각 그 재능대로

한 사람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더니

 

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여 또 다섯 달란트를 남기고,  

두 달란트 받은 자도 그같이 하여  

또 두 달란트를 남겼으되

한 달란트 받은 자는 가서 땅을 파고

그 주인의 돈을 감추어 두었더니

오랜 후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

그들과 결산할새

 

다섯 달란트 받았던 자는 

다섯 달란트를 더 가지고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내게 다섯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다섯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두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내게 두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두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한 달란트 받았던 자는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보소서당신의 것을 가지셨나이다.’                      

 

그 주인이 대답하여 이르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그러면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맡겼다가

내가 돌아와서

내 원금과 이자를  받게 하였을 것이니라.’ 

하고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라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하니라.

-예수(마태복음 25:13~30)


 달란트(talent)는 화폐 단위이자, 신이 각 개인에게 부여한 재능이나 능력, 기회를 나타내는 말이다. 누구든지 인간으로 생명을 얻었다면, 자기 내면을 천착하여, 자신의 달란트를 발견해야 한다. 각 개인은 타력에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기의 영혼의 힘을 키워 사랑하고, 성장하고, 창조해야 한다. 그것이 생명의 길로 나아가는 것이며, 노예가 아닌 주인으로 사는 것이다. 예수는 노예 의식을 주인 의식으로 전환시킨다.  

 

 또한 예수는 ‘거지 의식’을 ‘부자 의식’으로 전환시킨다. 부자는 ‘많이 가진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많이 줄 수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정신적인 것이든, 물질적인 것이든, 받아먹기만 할 수 있고, 스스로 생성할 수 없어, ‘가진 것에 집착’하는, 기생충 같은 죽은 의식이 ‘거지 의식’이다. 반대로 사랑을 줄 수 있고, 스스로 성장하며, 자신을 넘어 창조할 수 있는 의식은 ‘부자 의식’이다. 비유로 설명하자면, 부동산을 많이 가져서, 임대료를 많이 ‘받아먹을 수 있는’ 자가 부자가 아니라, 누구나 전 세계를 내 집처럼 누릴 수 있는 경험을, ‘줄 수 있는’ 에어비앤비가 부자다.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

네 보물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예수(마태복음 6:19~21)


 부자는 스스로 창조하는 것에서 기쁨을 얻기 때문에, 이미 가진 것에 집착할 필요가 없다. 줄 수 있는 개인에게는, 그에게 필요한 모든 것이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흘러 들어간다. 마치 스트리밍 서비스가 없던 시대에는 LP, CD, DVD, 비디오 등을 ‘소유’ 해야 했지만, 스트리밍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게 된 후에는, 가질 필요 없이 그저 필요한 것에 접속하기만 하면 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유튜브 알고리즘이 개인에게 최적화된 맞춤형 콘텐츠를 계속 띄워주듯이, ‘보이지 않는 손’은 ‘줄 수 있는 개인’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흘려보내준다. 무한한 것에 접속한 ‘부자 의식’은, 그래서 거리낌 없이 줄 수 있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예수(누가복음 6:38)


부유하게 된 자가

왕이 되게 하고

권력을 가진 자는

그것을 버리도록 하라.

-예수(도마복음 81절)


 예수의 복음, 즉 기쁜 소식(Good news)은, 회개하라는 말로 시작한다. ‘회개’의 희랍 원어는 ‘메타노이아’이다. ‘메타’는 ‘근본적인 변화’, ‘노이아’는 ‘생각’을 의미한다. 즉, 메타 노이아는 생각의 근본적인 변화를 의미한다. 예수가 설파한 ‘회개’의 본래적 의미는, 패러다임의 전환이라고 볼 수 있다. 예수는 인간 의식의 혁명 일으켰다. 

 

 예수는 혐오하는 군중-의 패러다임에서, 사랑하는 개인의 패러다임으로 전환하라는 것을 설파했다. 혐오하고, 아집에 빠지고, 기생하는 삶이 아니라, 사랑하고, 성장하고, 창조하는 삶을 살라는 것이다. 사랑성장창조는 창조주인 아빠(Abba), 신의 속성이다. 예수의 복음은, 인간의 신성 회복 선언’, 빛의 회복(광복) 선언’이다.

 

-우리 인간은 구걸해야 하는 거지도 아니고, 복종해야 하는 노예도 아니다. 인간은 스스로 양심과 욕심이 결합될 수 있게, 마음을 경영할 수 있는 역량이 있기 때문에, 자유롭다. 이러한 역량을 자유의지라고 한다. 자유의지가 있는 개인은 거듭날 수 있다. 거듭날 수 있는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아이들(天子)이다. 깨어있는 개인 하나하나가 곧 하나님의 성전이다. 하나님의 성전에는, 하나님(God=I am)’의 성스러운 영혼이 깃들어 있다. 우리 안에는 숨겨진 각자의 고유한 달란트가 있다. 그것을 스스로 탐구하여 발견하고, 세상에 실현하라. 무엇이 되려 하지 말고, 그대 자신이 되어라. 각자 분량의 운명의 무게(십자가)가 있다. 자신의 운명의 무게를 기꺼이 짊어져라. 끌려 다니지 말고 스스로 선택하라. 스스로의 선택에 책임져라. 부자가 돼라. 주인이 돼라. 인간의 영혼은 하나의 뿌리에서 나왔고, 하나의 뿌리로 다시 돌아간다. 각자로 살아가는 서로의 모습에서 자기 자신을 발견하라. 발견하면 서로의 삶을 존경할 수밖에 없다. 서로 사랑하라. 서로를 돋우며 성장하라. 서로가 서로에게 영감이 돼라. 자기 자신을 초월하여 창조하라. 두려워하지 말고, 지금 여기서 기쁘게 살라. 혼자 길 잃고 방황하는 자는, 하나님 아빠와 함께 살고 있다.–

 

  이것이 예수가 인류에게 전한 기쁜 소식(복음)의 실체이다. 광야의 예수는 혼자서 이렇게 외쳤다.


(카이로스, καιρός=결정적인 타이밍)

가 찼고

하나님(I am=Love)의 나라

(바실레이아, Βασίλεια질서, order)

가까이 왔으니

패러다임을 전환(메타노이아, μετάνοια)

하고,  

기쁜 소식

(유앙겔리온, εαγγέλιον=복음, Good news)

을 믿으라! 

-예수(마가복음 1:15)


광야는 넓어요, 
하늘은 또 푸르러요, 
다들 행복의 나라로 갑시다.
<한대수-행복의 나라>
[MV] 한대수 - 행복의 나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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