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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방인디출판/예수 컨설팅-포스트꼰대니즘의 전도

[예수 컨설팅] 제8장-전환시대의 논리

by 마음의제국 2020. 7. 21.

Leonardo Da Vinci-Salvator Mundi

 

 ‘표준화 패러다임’이란, 삶의 기준’을 세워, 삶을 개념화’하는 것을 말한다. 그 예는 장래희망, 방학 계획표 등이 있다. ‘삶을 개념화’ 한다는 것은, 삶의 구불구불하고, 삐뚤삐뚤하고, 굽이굽이 흘러가는 면들을, ‘직선적인 기준’으로 걷어내 버리는 것을 말한다. ‘표준화 패러다임’은 둥글게 순환하는 삶의 실상을, 직선적인 우상으로 대체시킨다. 

 

 표준화는 삶 자체를 ‘우상’, 즉 ‘허수아비 형상’으로 전락시킨다. 직선적으로 달려 나가는 컨베이어 벨트 위에, 한 번뿐인 삶 전체를 번제물로 올려 놓는다. 컨베이어 벨트는 지금 여기서 머무를 수 없다. 계속 직선적으로 달려 나가야 한다. 표준화는 지금 여기의 삶을, 나중 저기로 희생시킨다. 

 

 직선은 두려움을 낳는다.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모르던 시절의 인간들은, 세계가 직선적으로 펼쳐져 있다고 생각을 했다. 그 직선의 끝에는 낭떠러지가 있다고 여겨, 두려워했다. 그러나 실상은, 지구는 둥글고, 해와 달도 둥글다. 우주의 모든 움직임도, 직선적으로 달려나가는 것이 아니라, 둥글게 돌며 순환한다. 

 

모든 좋은 사물들은 
둥글게 곡선을 그리며
목표에 접근한다.
-니체
White - Square's dream, 화이트 - 네모의 꿈, MBC Top Music 19961214

 

 직선적인 우상으로 전락해버린 삶은, 기계처럼 돌아가는 시스템 속의 부속품에 불과하다. 표준화된 사람들은, 컨베이어 벨트의 템포 위에서 삶의 안정감을 느낀다.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 컨베이어 벨트 위로 오르기 위해, 경쟁한다. 그러나 인간 존재의 실상은, 직선으로 구성된 네모이기 보다는, 둥근 모양의 공에 가깝다. 공은 수동적인 자세로 ‘놓여’ 있는 것이 아니라, 언제든 튀어 나갈 기세로 ‘웅크리고’ 있다. 공은 굴러가고, 튀어 오르고, 날아다닌다. 그렇다. 인간의 삶은 컨베이어 벨트 위의 노동이 아니라, 어디로 튈지 모르는 놀이가 되어야 한다. 인간 존재는, 이유를 알 수 없게 이 세상에 던져졌지만, 이왕 던져졌다면, 삶 속에서는 자신의 실존을 공으로 삼아, 던지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 놀이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  

 

 아이들은 공을 가지고 놀 줄 안다. 공은 어디로 튈지 모른다. 컨베이어 벨트의 움직임처럼 움직임의 끝이 결정되어 있는, 일직선의 통제된 움직임은, 놀이로서 성립될 수 없다. 그것은 '어른들의 노동'이다. '아이들의 놀이'는 불확실성이 있는 움직임이기 때문에 성립될 수 있다. 

 

 놀 줄 안다는 것은, 불확실성 속에 자기 자신을 던질 수 있다는 것이다. 불확실성 속에 자기 자신을 던진다는 것은, 방황한다는 것이다. 표준화된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방황하는 개인은, 불안해 보인다. 그러나 불안은, 불확실성’ 속에 자기자신을 던진’ 사람들의 것이 아니라, 확실성’ 속에 자기자신을 가둔’ 사람들의 것이다.  

 

 ‘방황’은, 나중 저기’라는 ‘삶의 우상’을 파괴한, 삶의 실상’이다. 살아있기에 방황이 있다. 모호하기 때문에 ‘삶’인 것이고, 확실한 것은, ‘죽음’ 뿐이다. ‘삶’의 ‘모호성’을 ‘확실성’으로 개념화하여 살아가는 것, 즉 ‘표준화 패러다임’에 따라 살아가는 것은, 죽은 채로 사는 것’(Living Dead)이다. 

 

더는 사랑도 방황도 하지 않는 사람은
죽느니만 못하다
.
-괴테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예수(마태복음 22:32)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예수(마가복음 10:14~15)


 ‘표준화 패러다임’은, 삶을 컨베이어 벨트 위에 올려놓는다. 컨베이어 벨트는 나중 저기의 결과가 실현되어야, 비로소 만족을 느낄 수 있다. 컨베이어 벨트 위에서 지금 여기는 항상 불만족이 된다. 표준화된 인간의 마음속에는 불만족이 가득하다.

 

 반면 개인화 패러다임은, 나중 저기라는 우상을 파괴한다. 표준화 패러다임에 의해 주입받은 온갖 고정관념들을 비워낸다. 고정관념들은 가상의 것들이다. 인간이 ‘현실적인’ 문제라고 여기는 대부분의 것들은(종교, 국가, 문화, 화폐, 이념 등등), 인간의 관념 속에서만 존재하는 ‘가상’의 것들이다. 가상의 고정관념들이 비워지고, 텅 빈 그 자리에는, 지금 여기에 살아 숨 쉬는, (I am)’라는 존재만 있다. 살아 숨 쉬는 지금 여기의 나는, 진짜다. 살아 숨쉬는 모든 순간이 기적이라는 것을 느낀다. 현재(present)’가, 신의 선물(present)’임을 느낀다. ‘지금 여기’에서 곧바로 기뻐하고 감사한다. 사랑과 감사로 충만해진 개인은, 더 좋은 결과들을 끌어당긴다. 개인화된 인간의 마음속에는, 감사와 만족이 가득하다. 개인화된 인간은, 삶을 통째로 기뻐한다.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예수(마태복음 7:17~18)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모든 상황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데살로니가전서 5:16~18>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

-예수(요한복음 16:20)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

-예수(요한복음 16:22)


 표준화 패러다임은, 기계화된 대량생산의 시대에 적합했다. 그 시대의 사람들은 획일적인 것(uniform)’이 곧 성공적인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유니폼을 입고, 유니폼에 살고, 유니폼만 받아들였다. 획일적인 기준으로 사람을 줄 세워, 대규모 공채를 실시했다. 그들에게 특별한 것(special)’은, 불량품을 의미했다. 

 

 표준화는 ‘스테레오 타입’으로 인간을 찍어내고, 구분한다. 선생은 선생다워야 했고, 학생은 학생다워야 했다. 남자는 남자다워야 했고, 여자는 여자다워야 했다. 회장은 회장다워야 했고, 근로자는 근로자다워야 했다. 통치자는 통치자다워야 했고, 피통치자는 피통치자다워야 했다. 분업이라고 포장된 이러한 이분법의 실상은, 구상과 실행의 분리다. - 위계의 꼭대기에서 구상(생각)을 독점하니, 아래의 것들은 생각하지 말고, 시키는 데로 실행(행동)만 하라. -이것이 표준화 패러다임의 실체다. 즉, 일부 엘리트 계층의 완전한 합리성이라는 전제와, 다수 하부 계층의 생각하는 능력의 자발적 불구화의 결합이, 표준화 패러다임의 실체다.

 

표준화에는
한 가지 중대한 의문이 뒤따랐다

기업을 관리하는 기준은
누가 만들어야 하는가

이에 대해 테일러[1]는 
근로자들은 절대 아니라고
주장했다
.
<토드 로즈-평균의 종말>

[1] 과학적 관리법의 제창자인 미국의 경영학자. ‘테일러리즘, ‘포디즘(컨베이어 벨트 시스템)’에 큰 영향을 미쳤을 뿐만 아니라, 볼셰비키 혁명을 이끈 레닌 역시 테일러리즘에 경도되어, 공산주의 소련의 계획경제 수립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표준화 패러다임에는 두 가지 문제점이 있다. 첫 번째, 일부 엘리트 계층의 완전한 합리성은 현실성이 없다. 최근 행동경제학이 밝히고 있듯이, 인간은 제한적으로만 합리적이다. 두 번째, 다수 하부 계층의 생각하는 능력의 불구화는 악()을 양산한다.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이 이것을 설명한다. 악은 생각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에, 평범하다. 평범하다는 것은, 누구나 악할 수 있다는 것이다. 도덕적인 인간들이 모인 사회가, 비도덕적일 수 있는 이유는, 생각과 비판을 거세하는 조직의 메커니즘 속에서, 인간은, 기계처럼 가볍게 행동하게 되기 때문이다. ‘무(無) 사유’와 근면성이 결합되면, 이 나온다. 

 

 두 가지 문제점으로 인해 표준화 패러다임은이 땅에 지옥을 만들어낸다. 표준화 패러다임의 극단적인 예로는 히틀러의 홀로코스트, 스탈린의 공포정치, 마오의 문화혁명, 일본 제국주의, 북한 체제 등이 있다. 그러나 이것을 정치적 이분법으로만 나눠서 보면 안 된다. 인간이 만든 모든구상과 실행의 분리를 전제로 하는, 위계 조직은, 표준화 패러다임을 내포하고 있고, 이것은 지옥을 만들어낸다.

 

지옥의 모습은 결코 새롭지 않다.
<단테-신곡:지옥편>

나는 

나누어지지 않은 분으로부터 온 자이니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그가 온전하다면 

빛으로 채워질 것이나, 

그가 나누어진다면 

어둠으로 채워질 것이니라

-예수(도마복음 61절)


나는 나누는 자가 아니니라.

-예수(도마복음 72절)


 개인은 영어로 ‘Individual’이다. ‘In’이 접두사로 쓰이면, ‘Not’의 뜻을 가진다. ‘Dividual’은 ‘분할할 수 있는, 분리된’이라는 뜻이다. 즉, 개인을 뜻하는 ‘In+dividual’은, 분할할 수 없는분리되지 않은것을 의미한다. 나누어지지 않은 온전한 개인은, 군중-떼가 아닌, 나는 나(I am)’로 산다. 하나님=스스로 존재하는 자=I am’은, 나누어지지 않은 분=개인(Individual)’이다. ‘온전한 개인’은, 역설적으로, 파편화가 아닌, 하나로 연결된 관계(I and I)’를 의미한다.  

 

 구상과 실행의 이분법적 분리는, 하나의 관계인 인간 실존을, 집단으로 묶어, 인위적으로 구분한다. 구상과 실행이 나누어지면, 인간들 사이의 관계가, 위계로 변질된다. 이분법으로 나누어진 자는, 세상을 끊임없이 ‘위, 아래로’ 나누게 된다. 아래에서 실행만 담당하는 다수의 인간들은, 스스로 생각하지를 못하고, 영혼이 죽어간다. 영혼이 죽은 인간은, 움직이는 기계에 불과하다. 19세기의 기계 파괴 운동에서 인간이 느낀 분노와, 21세기의 인공지능 등의 발전으로 인해 인간이 느끼는 공포는, 동일한 감정선이다. 생각의 외주화’로 인해, 기계로 전락된 인간 실존의 자각이 그것이다.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전태일

 

여러분은 기계가 아닙니다!
-찰리 채플린
[찰리 채플린] 위대한 배우의 위대한 명연설 - 영화 위대한 독재자 (한영 자막)

 ‘구상과 실행의 분리’가 성립되려면, 일부 엘리트 계층의 구상의 독점이 먼저인가, 다수 하부 계층의 생각하는 능력의 자발적 불구화(생각의 외주화)가 먼저인가? 그것은 닭이 먼저냐, 알이 먼저냐 하는 것과 같다. 양자는 순환하고 무엇이 먼저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구상과 실행의 분리’라는 순환 관계를 파괴하기 위해서, 무엇이 선행되어야 하는지는 알 수 있다. 그것은 생각의 외주화를 멈추는 것이다.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기르는 것이다. 각자가 생각하는 개인으로 사는 것이다. ‘노예 정신’에서 ‘자유정신’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스스로 생각하는 힘이 있는 자는, 스스로 존재할 수 있는 자이다. 스스로 존재하는 자는 와이파이가 켜지 듯, 내면의 빛이 켜진다. 나누어지지 않은 근원에 접속한다. 개별성으로 나누어진 현상의 본질은관계적으로 연결된 하나임을 자각한다. 나와 남이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본질을 알기 때문에, 성인들은 다음과 같은 동일한 메시지를 남겼다.


성인은 항상

자신의 마음을 갖지 않고,  

사람들의 마음을 마음으로 삼는다

착한 사람에게 착하게 대하고

착하지 않은 사람에게도 착하게 대한다

그러면 세상의 덕이 선해진다

미더운 사람에게 믿음으로 대하고,  

미덥지 않은 사람에게도 믿음으로 대한다

그러면 세상의 덕이 신뢰로 가득 찬다

성인은 세상에 있으면서

자신의 의지를 거두어들이고,  

세상을 위하여

자신의 마음을 흐릿하게 한다

그러면 사람들은

그들의 눈과 귀를 그쪽으로 돌리니

성인은 모두 그들을

어린애 상태로 회복시켜 준다.

-노자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예수(마태복음 7:12)


내가 하고 싶지 않은 것을  

남에게 강요하지 마라.

-공자


먼저 나 자신을 이롭게 하고

그 이로움으로 남도 이롭게 하라.

-싯다르타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라.

-단군왕검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예수(마가복음 12:31)


 ‘네 이웃을/네 자신과 같이/사랑하라’에서 선행하는 것은,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다. 자신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자신을 사랑하는 것과 같이, 남을 사랑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모든 것의 시작은, 자기 자신을 성찰하는 것이다. 내가 없이는 세상도 없다. 내가 왜 기분이 좋은지, 왜 기분이 나쁜지, 내가 무엇을 진짜로 원하고, 무엇을 진짜로 원하지 않는지를 이해하는 것이, 인간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것의 시발점이다. 나 자신을 스스로 사랑하는 것이사랑을 줄 수 있는 존재로 거듭나는 것의 시발점이다.       

 

 나를 보지 않고, 남만 보는 것은 껍데기에 불과하다. 나 자신을 사랑해서, 나 자신을 변화시키고, 똑바로 사는 것이 먼저다. 나 자신이 없이, 다른 사람과 세상을 논하는 것은, 영혼이 없는 기계들의, 자기기만에 지나지 않는다. 나 자신의 하루 일상을 기분 좋게 경영하지 못하면서, 세상을 논하는 것은 거짓말이다. 그런 위선자들은, (I am)’라는 자존감이 없는, 가짜 기계 인간들이다. 자기 성찰에 불구가 된 이 기계인간들을, 아무런 무게감도 느끼질 못하고, 가볍게평범하게악을 짓는다.

 

군자는 자기에게서 구하고,  
소인은 다른 사람에게서 구한다.
-공자

 

사람들은 늘 말한다.  
모두가 
이 세상
이 나라
우리 집안에 대해 말한다

이 세상의 뿌리는
이 나라에 있고
,  
이 나라의 뿌리는
이 집안에 있으며

우리 집안의 뿌리는
이 몸에 있다
.
-맹자
친절한 금자씨 (Sympathy For Lady Vengeance, 2005) - 너나 잘하세요

아버지에게 불경을 저지르는 사람도

용서받을 수 있고

그 아들에게 불경을 저지르는 사람도

용서받을 수 있으나

성령에게 불경을 저지르는 사람은

지상에서나 하늘에서나  

용서받지 못할 것이니라.

-예수(도마복음 44절)


 예수가 말한 아버지(성부)와 아들(성자)은, 믿음의 대상이 될 수는 있을지언정, 지금 여기서 그 실체를 구체적으로 느끼거나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살아 숨 쉬고 있는 모든 인간은 지금 여기서, 자신의 영혼(성령)을 느낄 수 있다. 영혼이 실체가 있다는 것은 알 수가 있다. 영혼이 없다면 어떻게 인간이 계산기와 같이 실용성만 따지는 것이 아니라 온갖 미덕, 아름다움, 예술을 추구하겠는가? 영혼이 없다면 어떻게 감동하겠는가? 영혼이 없다면 어떻게 공감하겠는가? 영혼이 없다면 어떻게 사랑할 수 있겠는가? 영혼이 없다면 어떻게 창조할 수 있겠는가? 

 

 인간 개개인 안에는 영혼이 있다. 영혼이 없는 것은 기계다. 성령에게 불경을 저지른다는 것의 의미는, 첫째스스로 나 자신을 영혼이 없는 기계로 취급한다는 것과, 둘째타인을 영혼이 없는 기계로 취급한다는 것을 말한다. 첫째 의미가 확장되어, 둘째 의미를 낳는다. 그러므로, 스스로 나 자신을 영혼이 없는 기계로 취급하는 것은, 모든 악의 근원이다. 반대로, 스스로 나 자신을 사랑하는 것은 모든 선의 근원이다.  

 

 스스로 나 자신을 영혼이 없는 기계로 취급한다는 것은, 내 기분을 무시하는 것을 말한다. ‘기분’은, 영혼의 속삭임이자, 양심의 시선이다. 인간의 내면은 우주에서 완전히 발가벗겨져 있다. 나의 내면에서 올라오는 긍정적인 기분(자명한 느낌)과 부정적인 기분(찜찜한 느낌)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일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선택들을, 나의 기분을 살펴 스스로 해야 한다. 자명한 느낌이 오는 것은 선택해야 하고, 찜찜한 느낌이 오는 것은 거부해야 한다. 그리고 그 선택들에 책임을 져야 한다. 나의 내면의 기분을 살펴 스스로 선택을 하고, 스스로의 선택에 책임을 지며 사는 것이, 영혼으로 사는 것이다. 

 

 기분은 ‘지금 여기’에서 느껴지는 감각이다. 선택하는 힘은, 나중 저기의 ‘계획’으로의 도피도 아니고, 그때 거기의 ‘미련’으로의 도피도 아닌, 지금 여기의 에서 나오는 감각이다. 이 감각은 한 번에 얻어질 수 없다. 자전거나 수영을 배우는 것처럼, 실수를 반복하며 체득할 수 있는 감각이다. 내 기분을 관찰하기 위해,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 즉 나의 삶에 있어서 구상과 실행의 합일은, 내면의 빛을 회복하는 것이다. 영혼의 빛으로 밝게 살아가는 것이, 철학(밝음을 배움, 哲學)을 하며 사는 것이다. 나의 철학으로 살아가는 것이, 나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다.

 

 반대로 찜찜한 느낌, 부정적인 기분을 무시하고 억누르며 사는 것은, 자신의 영혼을 말살시키는 것이다. 영혼이 말살되어 기계로 전락한 자의 징표는, 나 때는 말이야라는 말을 달고 사는 것이다. 지금 여기 의 감각에 집중과 몰입을 하지 못하면, ‘나 때로 도피하게 된다.

 

 지금 여기에 ‘집중과 몰입’을 하지 않는 것은, 시대의 흐름에 조응하지 못하는 것이다. 시대의 흐름에 조응하지 못하는 것은, 무상한 것에 대한, 무지에 의한 것이고, 이것을 교양(Bildung) 없다라고 한다. 교양 없이, 내 삶의 ‘구상과 실행의 주인 됨’을 포기하는 것, 내면의 어둠을 방치하는 것, 생각 없이 세상의 흐름에 휘둘리는 것, 즉 철학의 빈곤은, 성령에게 불경을 저지르는 것이다. 내 실존의 뿌리인 원만한 참 나(I am)’를 외면하고, ()모난 마음(완악한 마음)으로 사는 것이, 성령에게 불경을 저지르는 것이다.  

 

 표준화 패러다임은 성령에게 불경을 저지른다. 이 거대한 기계는, 인간의 영혼을 말살하고, 인간을 네모난 기계의 부속품으로 전락시킨다. 인간을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본다. 이것을 대상화라고 한다. 

 

 표준화는 개인의 진실된 생각과 정서를 억누르게 한다. 개인이 자기의 내면의 소리, 즉 자기의 기분에 따르는 것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게 만든다. 표준화에 맞추려면, 내 기분과는 다른, 외부에서 바람직하다고 인정하는 개념화된 정서를 표현해야 한다. 이것은 항상적인 감정부조화를 불러오고, 이것이 현대인들의 스트레스의 근본적인 원인이다. 표준화 패러다임은, 개개인이 스스로를 영혼이 없는 기계로 대상화하도록 만들고, 다른 사람 역시 영혼이 없는 기계로 대상화하도록 만든다. 내면에서 올라오는 기분을 참고, 억누르면, 스트레스를 받고 괴롭다. 이 괴로움을 외면하기 위해, 생각을 외주화 해버린 뒤그냥 열심히 산다. 이것을 자기기만이라고 한다. 자기 성찰 없는 삶의 맹목성은, 브레이크 없이 달려 나가는 자동차와 같다. ‘철학의 빈곤’을 넘어, 철학의 아사(餓死)’를 요구하는 이러한 기계의 구조 속에서, '평범한 악'이 생겨난다. 

 

 표준화 패러다임이 악(惡, Bad)을 양산한다면, 개인화 패러다임으로의 전환이, 단순히 도덕과 당위성에 국한되는 문제인가? 그렇지 않다. 개인화 패러다임으로의 전환은실용적인 측면에서 볼 때도 요구되는 것이다. 

 

 선(, Good)이라는 것은 단순히 착하다는 의미에서 머무르지 않는다. 선은 한자로 해석하든, 영어로 해석하든 탁월하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선한 것이, 악한 것을 이긴다. 빛이, 어둠을 이기 듯. (Good)’이, (God)’에 가깝기 때문이다. 개인화 패러다임이 어떤 면에서 탁월하며, 왜 표준화 패러다임에서 개인화 패러다임으로의 전환이 요구되는지는 다음과 같다. 

 

1. 개인화 패러다임으로의 전환을 위한 물적 토대가 구축되고 있다

 

 초연결 시대의 도래가 그것이다. 사물 인터넷, 인공지능, 빅데이터, SNS 등의 발달은, 모든 것을 공유하고 연결하게 만들고 있다. 기술 발달의 흐름은 '시공간의 제약'을 급속도로 무너뜨리고 있으며, 이것은 지금 여기를 강화시키고 있다. 시대는 실시간으로 모든 것을 개방공유하여, 감추어진 모든 것이 드러나게 하고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내면의 영적인 세계가, 관계로 연결된 하나인 것이, 외부 물질계에서 드러나고 있는 현상이, 초연결 사회 도래의 본질적인 의미이다.


너희가 둘을 하나로

안을 바깥처럼

바깥을 안처럼 만들 때, 

그대들은 천국에 들어가리라.

-예수(도마복음 22절)


 초연결 사회는 새로운 권력(Power, )’을 탄생시키고 있다.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진정한 힘과 권능’이 자신을 드러내고 있다. 또,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구권력은 사실 힘(Power)이, 아니라 위력(Force)에 불과하다. 구권력은, 인간이 인위적으로 만든, 위계구조에서 나오지만, 신권력은, 창조주가 무위로 만든, 초연결된 개인(이것을 ‘I&I’라 한다)에게서 나온다. 

 

 [뉴파워:새로운 권력의 탄생]의 저자 제러미 하이먼즈는, ‘#미투 운동’과 ‘BTS’의 공통점은 신권력 현상이며, 권력의 전환은 이미 시작되었다고 하면서, ‘신권력 현상’을 이해하지 못하면, 이 시대에 살아남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무화과나무와 모든 나무를 보라.  

싹이 나면 너희가 보고

여름이 가까운 줄을  자연히 아나니

이와 같이 너희가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을 알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모든 일이 다 이루어지리라.

-예수(누가복음 21:29~36)


 

The Weeknd - I Feel It Coming ft. Daft Punk (Official Video)

위선자여!  

너희가 천지의 기상은 분간할 줄 알면서

어찌 이 시대는 분간하지 못하느냐?

-예수(누가복음 12:56)


 ‘구권력은, 인간들을 경쟁하게 하여, 서로 자기만 높이도록 만들어, 파편화 시킨다. 이것은 배제와 박탈의 두려움을 주입하여, 효율적인 통제 시스템을 만들어 낸다. 통제 시스템을 통해, 사람 위에 사람 있다는 노예 정신을 받아들이게 한다.    

 

 반면, 신권력은, 인간들을 사랑하게 하여, 서로서로 섬기도록 만들어, 하나로 회복시킨다. 이것은 마치 자연이 그러한 것처럼, 자율적인 창조 시스템을 만들어 낸다. 창조 시스템을 통해, 사람이 곧 하늘이다는 ‘자유정신’으로 사람들을 깨운다.   

 

 초연결 시대는 사랑을 줄 수 있는 진짜가 드러나게 하고, 가짜 꼼수 위선자들은 도태되게 하고 있다. 알맹이 없이 껍데기만 번지르르하게 만들어서 눈속임할 수 있던 시대는 끝이 났다. 시대는 갑질, 악덕, 눈속임, 범죄를 통해 높아진 가짜 위선자들에 대한 정보가 실시간으로 공유되게 만들어, 그들을 한순간에 추락시키는가 하면, 묻혀있던 진짜들을 한순간에 스타로 만들기도 한다.


너희 중에 큰 자는 젊은 자와 같고  

다스리는 자는 섬기는 자와 같을지니라.

-예수(누가복음 22:26)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예수(마태복음 23:12)


 누구든지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평상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는 들어가는 자들로

그 빛을 보게 하려 함이라.  

숨은 것이 장차 드러나지 아니할 것이 없고, 

감추인 것이 장차 알려지고

나타나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 

그러므로 너희가 어떻게 들을까

스스로 삼가라. 

누구든지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줄로 아는 것까지도 빼앗기리라.

-예수(누가복음 8:16~18)


경쟁 속에서 불행한 사람들에게 양준일이 전하는 이야기 | 양준일(@OFFICIAL양준일) 가수 | 행복 공감 위로 관계 | 세바시 1152회

 초연결 시대라는 ‘기술 발달’의 흐름은, 역설적으로, 영혼의 힘이 있는 개인의 시대, 개인의 인성과 개성이 중요시되는 시대를 열어젖히고 있다. IoT 전략가이자 미래학자인 W.데이비드 스티븐슨은, 그의 저서 [초연결]에서, 표준화 패러다임의 경영 방식인 ‘수직적 계층 구조’ [1]와 ‘선형적 공정 프로세스’ [2]는 도태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W.데이비드 스티븐슨은, 초연결 혁명은 이미 진행 중이며, 구시대의 패러다임에 묶여 ‘고립되고 망하거나’, 새 시대의 패러다임으로 전환하여 ‘연결하고 선점하거나’ 두 가지의 선택지가 있다고 주장한다. 기술이 발달할수록 사람에게 집중하며, 모든 정보를 조직원이 실시간으로 공유하고, ‘설계, 제조, 유통, 판매’를 초연결하는 ‘순환 기업’을 실현해야, 불필요한 비용은 제거되고, 혁신을 부르는 창의성은 폭발할 수 있다고 한다. 


[1] 권한과 직무에 따라 구성원을 계급화해 조직을 관리하는 체제.
[2] 작업 공정을 중단 없이 직선적으로 설계함으로써 효율을 획기적으로 늘려 대량 생산 시대를 불러온 생산 시스템.

 

가장 탁월한 것은 물과 같다.  
물은 온갖 것을 이롭게 하면서도
다투지 아니하고

모두가 싫어하는 낮은 곳에 머문다
그러므로 물은 도에 가깝다.
-노자

 

자연 어디에도
문이나 담장

경계선은 없다.  
마치 지구의 물이 전부
하나의 바다를 이루고

자세히 보면
썰물과 밀물이
하나인 것과 같은 이치다
.
-랄프 왈도 에머슨

 

 ‘순환하는 것의 대표는 물이다. 물은 계속 낮은 곳으로 흘러, 가장 큰 존재인 바다가 된다. 가장 큰 존재인 바다에서 다시 순환하여 온 대지를 적신다. 물은 유연하게 아래로 흐르면서, 지구 상의 모든 생명체를 잉태한다. 인간의 몸도 70% 정도는 물이다. 모든 물은 연결되어 있다. 컵 속의 물도, 폭포의 물도, 우리 몸의 물도, 모두 바다라는 근원에서 나왔으며, 다시 바다로 흘러 들어간다. 물은 수직적으로 우뚝 솟아 자기를 높이려 하지도 않고, 직선적인 움직임으로 자신을 한정하지도 아니한다. 낮은 곳으로 흐르고, 둥글게 순환하며, 만물을 이롭게 한다. 

 

 나누어지지 않은 개인(Individual)물과 같은 덕을 지닌 존재이다영적인 차원에서 인간은, 물과 같이 연결되어 있다. 모든 물이 바다라는 근원에서 나와서, 바다로 순환하여 돌아가듯, 인간의 영혼도 하나의 근원에서 나와서, 하나의 근원으로 돌아간다. 실존의 본질이, 연결되어 있고, 순환하는 것을 알게 되면, 낮은 곳으로 유연하게 흐르고, 남을 헤치지 않으며, 온갖 것을 이롭게 하는, 물과 같은 덕을 지닌 ‘개인’이 될 수 있다. 선한 영향력을 퍼뜨리는 물과 같은 덕을 지닌 개인이, 초연결 시대의 주체이다. 초연결 시대의 도래라는 물적 토대의 구축은, 개인화 패러다임으로의 전환을 요구한다.      

 

2. 개인화 패러다임이 더 똑똑하다. 

 

 인간은 관계적 존재이다. 인간의 위대한 성취는 협력을 통한 시너지에서 나온다. 협력을 하려면 집단적 의사결정이 이루어져야 한다. 협력의 성패는 집단적 의사결정의 질에 의해 결정되며, ‘집단적 의사결정의 질’은 집단지능(Collective intelligence)’에 의해 결정된다. 

 

 복잡계 네트워크 이론의 창시자이자, 과학자인 앨버트 라슬로 바라바시는, 그의 저서 [성공의 공식 포뮬러]에서, 집단지능에 대한 카네기멜론대학교의 연구를 소개한다. 집단의 구성원인, 개개인의 지적지능(intelligence quotient:IQ)’이 높으면, 그 개개인이 모인, ‘집단지능’도 높을 것이라고 예측할 수 있지만, 연구결과는 그렇지 않았다. 

 

 연구결과에 따르면, (1) 집단의 구성원인, 개개인의 ‘지적 지능(IQ)’이 아니라, 감성지능(Emotional intelligence:EI)’이 높아야, ‘집단지능’도 높았고, (2) 구성원들의 의사표현이 일부 똑똑한 권위자에 의해 독점되는 것이 아니라, 골고루 평등하게 이루어질수록 ‘집단지능’이 높았으며, (3) 마지막으로, 여성 구성원이 포함된 팀이, 훨씬 높은 ‘집단지능’을 보였다. 

 

 정리해보자면, 사람을 ‘지적지능(IQ)’ 순으로 줄 세우고, 권력 격차가 크며, 중요한 의사결정이 이루어지는 층에서, 여성이 배제되어 있는 조직은, 멍청하다.  

 

 ‘집단지능은 결론적으로, 얼마나 실질적인 수평적인 관계를 형성할 수 있느냐에 달려있다. 그리고 ‘수평적인 관계’를 형성하는데 핵심적인 요소가 바로, 개인의 감성지능이다. 감성지능의 대표적인 연구 학자인 다니엘 골만(D. Goleman)은, 200여 개의 글로벌 기업들에 대한 조사를 통하여, 감성지능과 측정 가능한 사업결과 사이에는 정의 상관관계가 있음을 밝혔다. 

 

 감성지능은-(1) 자신과 타인의 감정을 인식하는 능력,  (2) 인식된 감정의 의미를 파악하는 능력, (3) 감정을 조절하는 능력-으로 구성된다. 

 

 이러한 ‘감성지능’은 ‘영성 지능’과 직결된다. 영적인 차원에서, 모든 것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정도가 ‘영성 지능’이고, 이것의 표현이 ‘감성지능’이다. 

 

 감성지능이 떨어질수록, 소외되고 파편화된, ‘몸과 마음’만을 자기 자신으로 인식한다. 하나인 근원에서 멀어진다. 그래서 ‘감성지능’이 떨어질수록, 이기적인 소시오패스에 가까워진다.         

 

 감성지능이 떨어질수록, 자신과 타인의 감정을 ‘관찰’ 하지 못하고, ‘조절’ 하지 못하여, 그것에 그냥 휘둘린다. 그래서 ‘감성지능’이 떨어질수록, ‘감정적이다.  

 

 다음은 2017년 3월 14일, ‘세계 뇌 주간 대한민국 뇌교육 세미나’에서의, 이승호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 교수 말을 인용한다. 

 

태아부터 21세까지뇌 기능의 발달에는 순서가 있다그런데 이러한 과정을 무시하고 조기교육에 열을 올린다면오히려 그 시기에 발달해야 할 뇌 기능이 퇴화한다많은 신경세포를 수용하려는 뇌에는 주어진 한계가 있다따라서 인위적으로 주입하는 것이 아닌상황에 맞게 교육하여각 뇌 구조의 소통이 원활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외국의 모 대학에서 
창의성 수치가 높은 아이들과 낮은 아이들을 비교해본 결과창의성이 높은 아이들은 전전두엽이 활발하고좌우 뇌의 소통이 원활했다뇌의 모든 부위가 동시에 소통될 때 신경망이 활성화되는데이것은 책상에 앉아서 정보를 주입하는 암기식 교육으로는 가능하지 않다. 몸을 움직이는 운동 기능과 시각·촉각·후각 등의 감각그리고 감정이 연결될 때집중력과 창조력이 길러지고 학습능력이 높아진다이는 신체활동을 기반으로 정서 조절을 하는 뇌 교육이 필요한 이유다.
 
 인공지능은 인간이
, ‘가장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존재를 만들고자 하는 욕구에서 출발했다이로 인해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판단은 인공지능이 대신하며인간은 이들이 할 수 없는 것을 해야 한다인공지능 학자들은 인공지능이 가질 수 없는 것으로 '감정'을 꼽았다그 감정을 느끼는 힘이 감성이며앞으로 감성이 발달한 뇌를 가진 사람들이 성공하고 완성하는 시대가 올 것이다뇌 교육은 감정이 아닌, ‘감성을 가르치는 교육으로, (이를 통해신체 감각과 자신의 감정을 읽는 능력이 깨어나자기 자신을 이해하고삶의 목적을 찾아 몰입하게 된다.
 
 감정을 인식하고, 표현하며, 조절하는 힘이자, 내 느낌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고, 공감하는 능력
이, 감성’이다. 이러한 ‘감성’이 발달한 뇌를 가진 자가 21세기 지도자가 될 것이다.”

 

 구상과 실행이 이분법적으로 분리되어, 소수의 권위적인 늙은 남성들이, 수직적인 위계 위에 군림하면서, 엄숙하고 경직된 분위기에서, 상명하복 하며, 의사결정을 독점하는-표준화 패러다임의 조직은, 감성지능이 떨어지는 말종인간(The Last Man)’들이 주도권을 가지는 조직이다. 이것은 말종조직(The Last Organization)’의 표본이다. 말종조직은 집단지능이 떨어진다. 그래서 집단사고(Groupthink)’와 같은, 집단적 의사결정에 있어서의 치명적인 오류가, 지속적으로 발생한다. 그렇기 때문에, 지속 가능하지 않다. 바벨탑은 무너진다.

 

 구상과 실행의 통일체인 온전한 ‘개인’(In+dividual, 나누어지지 않은 자)들이, 수평적인 관계로 연결되어,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서로 공감하며, 긴밀하게 소통하는-개인화 패러다임의 조직은, 감성지능이 높은 개인’들이 주도권을 가지는 조직이다. 개인화 패러다임의 조직은 집단지능이 더 탁월하다. 그래서 ‘집단적 의사결정의 질’이 지속적으로 더 탁월하고, 이에 따르는 ‘성과’ 역시, 지속적으로 더 탁월하다. 그렇기 때문에, 지속 가능하다.

 

 ‘함께’는 지혜입니다. 영국의 과학자이며 우생학의 창시자인 골턴이 여행 중에 시골의 가축 품평회 행사를 보게 됩니다. 그 행사에는 소의 무게를 알아맞히는 대회가 열리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표를 사서 자기가 생각하는 소의 무게를 적어서 투표함에 넣는 것입니다. 나중에 소의 무게를 달아서 가장 근접한 무게를 써넣은 사람에게 소를 상품으로 주는 행사였습니다. 

 골턴은 사람들의 어리석음을 확인하는 재미로 지켜보았습니다. 물론 정확하게 맞춘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800개의 표 중 숫자를 판독하기 어려운 13장을 제외한 787개의 표에 적힌 무게를 평균했더니 1,197파운드였습니다. 실제로 측정한 소의 무게는 1,198파운드였습니다. 군중을 한 사람으로 보면 완벽한 판단력입니다. 우파 우중(愚衆, 어리석은 대중)론자인 골턴에게는 충격이었습니다. 집단지능(Collective intelligence)과 민주주의에 대해 다시 생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신영복-담론>

너희가 둘을 하나,  

위를 아래처럼 만들 때,  

남자와 여자를 하나로 만들어 

남자는 남자가 아니고  

여자는 여자가 아닌 것으로 만들 때

그대들은 천국에 들어 가리라.

-예수(도마복음 22절)


성인이 하는 정치는  
저 지혜롭다고 하는 자들로 하여금  
감히 무엇을 하려고 하지 못하게 한다.
-노자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예수(마태복음11:25)


 

If the kids are united, 
아이들이 연대한다면,  
then we’ll never be divided! 
우리는 절대로 나누어지지 않을 것이다!
<sham69- If the Kids are united>
Sham 69 - If The Kids Are United (Live, 1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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