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되, 나는 아노니.
만일 내가 알지 못한다 하면,
나도 너희같이 거짓말쟁이가 되리라.
나는 그를 알고,
또 그의 말씀을 지키노라.
-예수(요한복음 8:55)
믿음의 종류는 (1) 작은 믿음, (2) 큰 믿음, 두 가지가 있다.
(1) ‘작은 믿음’은 머리로 하는 믿음이다. 머리는 인위적으로 계산하고 증명해야 한다. 이유를 따져야 한다. 작은 믿음의 반작용은, 의심이다. 작은 믿음은, 의심을 억누르기 위해서 강해져야 한다. 강해지고 굳어지는 것은, 죽음의 무리다. 강해지고 굳어진 작은 믿음은, 의식 수준을 죽음의 길로 내몬다. 작은 믿음의 귀결은, 맹종과 우상숭배다. 군중-떼를 주체로 하여, 타력에 의지하는 기복 신앙이, 작은 믿음이다.
(2) ‘큰 믿음’은 심장으로 하는 믿음이다. 심장은 그냥 움직인다. 심장이 뛰는 것을 인위적으로 조절할 수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심장이 뛰는 것을 의식하지 않고 산다. 의식하지 않아도, 심장이 뛰는 것은 ‘사실’이다. 그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심장이 멈출까 두려워하지 않는다. 알고 있기 때문에 마음 놓고 불안해하지 않는 믿음, 그것이 ‘큰 믿음’이다. 큰 믿음은 ‘두려움을 뛰어넘는 용기’, ‘완전한 신뢰’, ‘힘 빼고 맡김’으로 귀결된다. 큰 믿음의 주체는, 주체적인 개인이다.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예수(마태복음 8:26)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예수(마태복음 14:31)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예수(마태복음 15:28)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예수(누가복음 8:48)
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예수(누가복음 18:42)
일상을 짓누르는 믿음은, 필요 없다. 인간을 자유롭게 만드는 믿음은, 필요하다. 불안과 두려움을 주입하는 믿음은, 필요 없다. 용기와 기쁨을 주는 믿음은, 필요하다.
예수의 믿음은 큰 믿음이다. 이것은 신에 대한 완전한 신뢰다. 내맡김이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다. 일희일비(一喜一悲) 하지 않고, 어떤 일이 일어나든지 점점 더 좋아지고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아는 것이 힘이다.
‘큰 믿음’을 가지는 것은 마치 자율주행 자동차를 타는 것과 같다. ‘여기 깨어있음’과 동시에 ‘완전히 신뢰하고 내맡기는 것’이다. 혼자가 아니라, 신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다.
인간이, 혼자가 아닌, ‘신과 함께’ 살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숨을 쉬고, 심장이 뛰고 있다는 사실이, 인간 자신의 의지에 의한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생명’(生命: 살아라고 하는 명령) 자체가, 이미 신의 의지(will) 안에 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목숨을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예수(마태복음 6:25~34)
아빠(Abba),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not what I will, but what you will).
-예수(마가복음 14:36)
예수는 신을 ‘아빠(Abba)’라고 부른다. 여기서 ‘아빠라고 불러 버림’의 맥락이 중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국가주의에서의 국부(國父)처럼, 상명하복을 전제로 하는 가부장제를 연상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의 신을 ‘아빠라고 불러버림’은, 가부장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당시 유대 사회는 신의 이름을 함부로 부를 수 없을 정도로, 신이 ‘우상화’, ‘절대적 타자화’ 되어 있었다.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
-출애굽기 20:7
그런 상황에서 신을 아빠라고 부르는 것은, 그 자체가 혁명이었다. 왜냐하면 아빠와 자녀 사이에는 중개인이 필요 없기 때문이다. ‘신이라는 아빠’와 ‘인간이라는 자녀’ 사이에, 브로커가 필요 없다는 사실은, 모든 위계를 파괴한다.
신을 아빠라고 ‘불러 버림’의 혁명성은, 신과 인간의 ‘수직적인 거리’를 하늘과 땅의 거리에서, 서로 마주할 수 있는 거리로 좁힌 것이다. 이제 신은 감히 부를 수도, 볼 수도 없는 위치에서, 인간의 위치로 내려온다. 반대로 말하면, 인간은 신과 시선을 맞추는 위치로, 올라간다.
신을 ‘아빠’라고 불러 버림의 혁명성은, 신과 인간의 ‘수평적인 거리’마저 없애는 것에 있다. 동양적 관점[1]은, ‘아버지 나를 낳으시고, 어머니 나를 기르시니’이다. 아버지의 씨가 뿌려지는 것이, 새로운 생명 탄생의 시발점이라는 것이다. ‘인간’인 예수는 ‘신’을 ‘아빠’라고 부른다. ‘아빠’인 ‘신의 씨’가 발아하여, ‘인간’ 예수가 되었다. ‘인간 안에는 신의 씨가 있다.’ 이것이 예수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다.
[1] 예수가 활동한 지역은 동양과 서양이 접하는 곳이다. 당시 이미 실크로드를 통한 교역이 있었다.
“헤롯 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말하되,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하니 (마태복음 2:1~2)”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뿌릴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고,
더러는 흙이 얕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해가 돋은 후에 타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귀 있는 자는 들으라.
-예수(마태복음 13:1~9)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가 되느니라.
-예수(마태복음 13:23)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요한 1서 3:9>
‘인간 안에는 신의 씨가 있다’는 것은, 맹자의 성선설과 통하는 이야기다. 맹자의 성선설은, 인간이 그냥 착하다는 것이 아니다. 세상에는 짐승, 벌레 만도 못한 인간들이 널려 있다. 맹자가 성선설을 주장한 것의 의미는, 인간 안에는 인간이, (선한) 인간 다울 수 있는, ‘마음의 씨’가 있다는 것이다. 그 씨가 ‘4단(端)’이다. '단(端)'은 단서, 실마리, 씨앗을 의미한다. 여기서 4단은 측은지심(타인의 고통에 공감하고 함께 아파할 줄 아는 마음), 수오지심(자신의 잘못에 대해 부끄러운 줄 아는 마음), 사양지심(타인을 공경하고 양보하는 마음), 시비지심(자신 스스로 옳고 그름을 판단할 줄 아는 마음)을 말한다. 이러한 네 가지 마음씨가 싹이 터야, 비로소 ‘인간’이라는 것이다.
4단이 싹트지 않아서 인간이 덜 된 인간을, ‘싸가지 없는 놈’이라고 한다. ‘싸가지’의 어원은 ‘싹수’다. ‘싹’은 어린잎을 의미하고, ‘수’는 가능성을 의미한다. ‘싹수가 없다’, 즉 ‘싸가지가 없다’는 말의 의미는, 인간이 인간 다울 수 있는 ‘마음의 씨’가, ‘싹틀 가능성이 없다’는 뜻이다. 인간이 될 가능성이 없다는 뜻이다. 짐승, 벌레라는 뜻이다.
즉, 타인의 고통에 대한 공감 능력이 없고(측은지심의 불구화), 자신의 잘못에 대해 부끄러운 줄을 모르며(수오지심의 불구화), 타인에게 무례하게 행동하여 피해와 상처를 주고(사양지심의 불구화), 옳고 그름에 대한 양심의 개념이 없는 자들은(시비지심의 불구화), ‘싸가지가 없는 놈들’이다. 싸가지 없는 놈들은, 사람이 아닌, ‘짐승, 벌레’다. 맹자에 따르면, 인생의 미션은, ‘사람-됨’이다.
예수의 메시지도 이와 동일하다. 껍데기가 인간이라고, 다 같은 인간이 아니다. 인간 마음 안에는 ‘신의 씨앗’이 있다. 이것을 싹 틔우면, ‘인자(人子)’ 즉, ‘사람의 자녀’가 되지만, 싹 틔우지 못하면, ‘털 없는 원숭이의 새끼’에 불과하다. ‘인자’라는 용어는, 사람이 사람다워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사람답지 않으면, 사람이 아니다.
자그맣고 메마른 씨앗 속에서
내일의 결실을 바라보듯이
자그만 아이의 읊음 속에서
마음의 열매가 맺혔으면
<김광석-나의 노래>
신의 씨앗을 싹 틔우는 과정은, 털 없는 원숭이로 태어난 인간이, 신과 같은 존재로 ‘다시 태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에 따르면, 인생의 미션은, ‘거듭남(Born again)’이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예수(요한복음 3:3)
인간은 극복되어야 할 그 무엇이다.
그대들은 자신을 극복하기 위해
무엇을 했는가?
지금까지 모든 존재는 자신을 넘어서
그 무엇인가를 창조해 왔다.
그런데도 그대들은
이 거대한 밀물의 한가운데서
썰물이 되기를,
자신을 극복하기보다는
동물로 되돌아 가기를 원하는가?
인간에게 있어서 원숭이란 무엇인가?
웃음거리 아니면 견디기 힘든 수치.
초인(Overman)에게 있어서도
인간은 꼭 그와 같은 존재.
즉 웃음거리 아니면
견디기 힘든 수치다.
그대들은 벌레로부터
인간에 이르는 길을 걸어왔고,
많은 점에 있어서 아직도 벌레다.
일찍이 그대들은 원숭이였고,
지금도 그 어떤 원숭이보다
더 원숭이다.
<니체-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인간은
짐승과 초인 사이에 놓인 밧줄이다.
심연 위에 걸쳐진 밧줄이다.
저쪽으로 건너가는 것도 위험하고
줄 가운데 있는 것도 위험하며
뒤돌아보는 것도
벌벌 떨고 있는 것도
멈춰 서는 것도 위험하다.
인간이 사랑스러울 수 있는 것은
그가 건너가는 존재이며
몰락하는 존재라는 데 있다.
<니체-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인간은 건너가는 존재다. ‘건너감(바라밀)’은 움직임이다. 행동이다. 행동은 곧, 살아내는 것이다. 행동의 변화 없이, ‘삶’의 변화 없이, 말로만 하는 믿음은 ‘작은 믿음’이다. 머리로 하는 믿음이다. 예수에 대한 ‘작은 믿음’의 극단은, ‘예수의 우상화’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동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예수(마태복음 7:21)
예수가 인류에게 요구하는 것은, 자신을 ‘우상화’하라는 것이 아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
(노예를 해방시키기 위해
대신해서 부담하는 대가)로
주려 함이니라.
-예수(마가복음 10:45)
예수가 인류에게 요구하는 것은, 자신을 ‘따르라’는 것이다. 팔로우하라는 것이다. 팔로워가 되라는 것이다. 맞팔하자는 것이다.
Follow me!
나를 따르라!
-예수(요한복음 21:19)
‘예수-따름’은 ‘행동’을 요구한다. ‘살아내는 것’을 요구한다. 인간 안의 신의 씨를 싹 틔우는 몸부림을 요구한다. 사람다움을 요구한다. 짐승, 벌레와는 다름을 요구한다. 의식 수준을 하늘 높이까지 상승시키길 것을 요구한다. 자유로울 것을 요구한다. 거듭날 것을 요구한다. 사랑하며 살아갈 것을 요구한다. 사랑할 수 있는 존재가 될 것을 요구한다. ‘예수-따름’의 극단은, ‘예수-됨’이다.
여기서 ‘예수-됨’이라는 것의 의미는, 종교적인 의미에서 재림 구세주가 되라는 것이 아니다. 각 ‘개인’이, 일상의 ‘매 순간’ 선택 속에서, ‘예수라면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할까?’라는 질문을 던지며, 성찰하는 것이, ‘예수-됨’의 시발점이다.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예수(요한복음 13:15)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예수(요한복음 13:34)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야고보서 1:22>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
<야고보서 2:24>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야고보서 2:26>
너희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
<고린도전서 16:14>
아이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actions)과 진실함으로 하자.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니
<요한 1서 3:18~19>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서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Do)이라.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
<요한 1서 3:22>
‘믿음만’으로 천국에 갈 수 있다는 내용이야 말로 ‘적-그리스도’의 가르침이다. 예수와 그 제자들은 분명하게 ‘행동’을 요구하고 있다. 행동 없이 믿음만을 내세우는 것은, 겉과 속이 다른 ‘위선자(hypocrite)’들의 행태이다. ‘믿음’만 있거나, 억지 ‘행함’만 있는 것은, 반쪽짜리 ‘예수-따름’이다. ‘큰 믿음’(신에 대한 완전한 신뢰)에 기반한 ‘큰 행동’(서로 사랑할 것)이 있어야, 온전한 ‘예수-따름’이다.
제자가 그 선생보다 높지 못하나
무릇 온전하게 된 자는
그 선생과 같으리라.
-예수(누가복음 6:40)
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것(말씀)을
마시는 사람은
나와 같이 될 것이며,
내 자신이 바로 그 사람이 될 것이니라.
그러면 감추어진 것들이
그에게 드러나게 될 것이니라.
-예수(도마복음 108절)
*예수(a)는 신(b)이다. => (a=b)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예수(요한복음 10:30)
*예수(a)는 사람(c)이다. => (a=c)
인자(Son of man, 사람이라는 뜻)는
와서 먹고 마시매, 너희 말이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하니
-예수(누가복음 7:34)
*사람(c)은 신(b)이다. => (c=b)
인내천(人乃天, 사람이 곧 하늘이다.)
너희 율법에 기록된 바,
'내가 너희를 신이라 하였노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거든,
하물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사,
세상에 보내신 자가,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는 것으로
너희가 어찌 신성모독이라 하느냐?
-예수(요한복음 10:34~36)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God is Love)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
<요한 1서 4:16>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예수(요한복음 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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