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노티 세아우톤(γνῶθι σεαυτόν)’은 그리스 델포이 아폴론 신전의 앞마당에 새겨져 있던 문구로, ‘너 자신을 알라’라는 뜻이다.
너희가 너 자신을 알게 되면
너희는 알려질 것이요,
살아계신 아버지의 자녀가
자신임을 깨닫게 되리라.
그러나 자신을 모른다면
빈곤 가운데 사는 것이며,
빈곤 그 자체 이니라.
-예수(도마복음 3절)
모든 것을 알되
자기 자신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니라.
-예수(도마복음 67절)
끊임없이 앎을 축적하지만 공허하다. 눈 앞에 펼쳐진 세상은 빠르게 변화한다. 지식, 정보, 트렌드, 계절, 정치환경, 경제환경, 사회문화적 환경, 기술적 환경……그 어느 것도 고정된 실체로서 존재하지 않는다. 변화한다. 어느 시점의 세상이 진짜 세상인가? 강물이 흘러가 버리듯 잡을 수 없다. 무상(無常)하다.
시선을 돌려 나를 바라본다. 나는 누구인가? 몸이 나인가? 갓난아기일 때부터 늙어서 죽는 그날까지 몸은 한 번도 고정된 실체로서 존재하지 않는다. 변화한다. 어느 시점의 몸이 나인가? 강물이 흘러가 버리듯 잡을 수 없다. 무상(無常)하다. 몸은 진짜 내가 아니다.
시선을 더 안으로 향해본다. 나는 누구인가? 마음이 나인가? 나의 생각, 감정, 오감(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이 나인가? 갓난아기일 때부터 늙어서 죽는 그날까지 마음 역시 한 번도 고정된 실체로서 존재하지 않는다. 변화한다. 어느 시점의 마음이 나인가? 강물이 흘러가 버리듯 잡을 수 없다. 무상(無常)하다. 마음도 진짜 내가 아니다.
이것은 진정한 실재가 아니다.
진정한 실재는 커튼 뒤에 있다.
진실로 우리는 이곳에 있지 않다.
이것은 우리의 그림자다.
-잘랄 아드딘 무하마드 루미
그렇다면 나는 도대체 누구인가? 모든 것이 텅 비어있고, 무상(無常)하고, 아무것도 없는 것인가? 이 모든 것이, '없는 것'인가? 이 모든 것이, 무(無)인가? 허무주의로 귀결되는 것인가?
아니다, 있다. 무엇인가가 있기는 있다. 나는 엄연히 존재하고 있다. 변화하는 세상을 의식하고 있는, 나(I am)는 존재하고 있다. 변화하는 몸을 의식하고 있는, 나(I am)는 존재하고 있다. 변화하는 마음을 의식하고 있는, 나(I am)는 존재하고 있다. 이 모든 변화하는, 무상(無常)한 것들을, ‘의식’하고 있는, ‘나(I am)’라는 존재가, 있다. 변화하며, 강물처럼 흘러가버리는, 무상한 것들을, 의식하고 있는 고정된 본체가 있어야, ‘나(I am)’라는 존재가 실존하고 있다는 것을 설명할 수 있다. ‘나는 의식한다, 고로 나(I am)는 존재한다.’ 그 ‘의식’하고 있는 본체가 ‘진짜 나’다. 나의 내면 가장 깊은 곳에서, 침묵하며, 모든 것을 의식하고 있는, ‘나는 나’라는 현존의 자리, 그것이 ‘참-나(I am)’다.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
<예레미야 29:13>
구하는 자는
찾을 때까지
구함을 멈추지 말라.
그가 찾게 될 때
불안하게 될 것이요,
그 불안은
놀라움으로 바뀔 것이며
마침내 그는
모든 것을 지배하리라.
-예수(도마복음 2절)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참-나)이니라.”
God said to Moses,
“I am who I am”
<출애굽기 3:14>
지혜로운 구도자는
깊은 명상을 통해,
모든 개념과 시간 너머에 있는
참 나를 깨닫는다.
심장의 동굴 속에
깊숙이 숨어 있는
참 나를 깨닫는 사람은
고통과 슬픔이 없는 세계에 도달한다.
육체가 내가 아니고,
마음도 내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은
지극한 기쁨 속에 머문다.
<우파니샤드>
‘스스로 존재하는 자’는
내면에 머물고 있는
즐거움의 근원이다.
우리의 깊은 차원의 의식은
가슴속에 머물고 있는 그를 바라보며
기쁨으로 충만하다.
그가 만약 가슴속에 없다면
숨을 쉬며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있겠는가?
그는 모든 존재의 가슴을
기쁨으로 채우고 있는 자이다.
자기 내면에 있는
‘스스로 존재하는 자’
곧 참 나를 깨달으면
모든 생명체가
'하나’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모든 존재의 이름과 형상이
구별되는 것이 아니며,
변하지 않는
‘영원한 하나’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면 모든 두려움이 사라질 것이다.
모든 존재가
하나라는 것을 깨닫기 전에는
두려움이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책을 많이 읽어서 아는 것은 많아도
모든 존재가
하나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면
남과 자기를
구별해서 보는 인식으로 말미암아
가지가지 두려움에 휩싸이게 될 것이다.
<우파니샤드>
가장 깊은 곳에서
나는 날 봤어
<BTS-Black Swan>
이것은 ‘영혼의 지도’다. 인간 존재는 몸, 마음, 영혼으로 구성되어 있다. 인간은 물질세계에서, 몸의 감각기관으로 외부의 자극을 받아들인다. 마음은 외부의 자극을 생각, 감정, 오감으로 처리한다. 이 모든 것을 의식하는 영혼은, 인간 존재의 뿌리다.
유물론적 세계관에 익숙한 사람들은 영혼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한다. 뿌리에서 멀어진다. 마음의 작용은 몸과 바깥세상에만 초점을 맞춘다. 마음 작용의 방향이 외부로만 향한다. 남과 나를 구분하고 비교한다. 남의 떡이 더 커 보인다. 배가 아프다. 자존감이 낮아진다. 공허감을 느낀다. 공허감을 해소하려고 외부에서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채운다. 과소비, 과시, 육체적 쾌락, 폭음, 폭식, 온갖 자극적인 것들에 중독된다. 그래도 공허하다. 이유를 알 수 없는 공허감과 허무감 때문에 두렵다. 이 두려움을 극복하고, 자기가 존재한다는 것을 느끼기 위해서 과로를 한다. 노력 중독에 빠진다. 번아웃이 온다. 절망감에 휩싸인다. 화가 난다. 탐(욕심), 진(분노), 치(어리석음) 세 가지 번뇌 때문에 괴롭다. 번뇌는 무상한 것에 대한 집착으로 일어나는 마음의 갈등이다. 무상한 것에 대한 집착은 ‘몸-마음’만이 나라는 착각에서 비롯된다. ‘몸-마음’만이 나라는 착각은, 인간 존재의 뿌리인 ‘영혼’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에서 비롯된다. 마음 작용의 방향이 외부로만 향하면, 감정 기복에 시달린다.
감정(emotion)과 기분(mood)은 구별된다. 감정(emotion)은 사람이나 사물이라는 ‘외부’의 특정 대상(객체)을 향한 강한 느낌을 말한다. 감정의 어원을 살펴보면 “e(in→out) + motion(to move)”의 두 부분으로, 사람을 안에서 밖으로 움직이게 한다는 뜻이 된다. 마음의 작용이 ‘외부’로만 향할 때, 오만 가지 ‘감정’에 빠지게 된다.
기분(mood)은, 감정보다는 덜 강렬한 느낌으로, 자극의 원인(객체)이 불분명한 상태를 의미한다. ‘감정’이 ‘외부’의 특정 대상에 대한 반응인데 반하여, ‘기분’은 ‘내면’에서 올라오는 느낌이다. ‘감정’은, 복잡하고 다양한 유형이 있지만, ‘기분’은, ‘긍정적인 기분’, ‘부정적인 기분’ 두가지 밖에 없다. 기분의 정체는, ‘영혼의 속삭임’이다. 마음은 언어로 생각할 수 있지만, 영혼은 언어를 모른다. 영혼은 긍정적인 기분(자명), 부정적인 기분(찜찜), 두 가지 신호 밖에 줄 수 없다. ‘긍정적인 기분’은 마음이 영혼과 정렬한 상태, ‘부정적인 기분’은 마음이 영혼과 정렬을 이루지 못한 상태이다. 이 신호를 들으려면, 밖으로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마음의 작용을 거두어들이고, 내면을 향하게 해야 한다. 내면의 내 영혼이 무엇을 원하는지 들어야 한다. 내 영혼이 원해서, 내 마음과 하나되어 원할 수 있는 것이, 내 존재가 ‘진짜로 원하는 것’이다. 진짜로 원하는 것을 하면, 기분 좋다.
너희가 둘을 하나로 만들 때
인자(사람)가 될 것이며,
너희가 ‘산이여, 여기서 움직여라’고 말하면,
산이 움직일 것이니라.
-예수(도마복음 106절)
예수는 둘을 하나로 만들 때, 자신과 같은 존재(인자, 사람)가 될 수 있다고 한다. 여기서 둘은, 영혼(비국소적 자아, 보편적 자아, 참 나)과 마음(국소적 자아, 개별적 자아, 에고)이다. 이 둘이 하나가 되려면, 마음 작용의 방향이 외부가 아닌, 내면을 향해야 한다. 존재의 뿌리가 되는 영혼을 인식해야 한다. 영혼이 보내는 신호를 느낄 수 있어야 한다. 긍정적인 기분을 유지하며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 ‘기분’ 좋은 일을 하며 살아가야 한다. 마음이 영혼에 정렬을 이루어, 긍정적인 기분으로, 진짜로 원하는 것을 하면, 세상을 움직일 수 있다.
반대로, 내가 진짜로 원하는 것을 하면서 살지 않으면, 남과 세상이 원하는 대로 살게 되고, 부정적인 기분으로 살게 된다. ‘에고’만이 나라고 착각하면, 마음의 작용이 외부로만 향하게 되고, 마음이 영혼과 정렬을 이루지 못한다. 남과 나를 비교하게 된다. 이유를 알 수 없는 공허감과 허무감 때문에 괴롭다. 무엇인가 꽉 막혀있는 느낌이 든다. 자존감이 낮아져서 외식(겉치레)하게 된다. 감정 기복에 시달린다. 내면의 평화를 찾을 수 없다.
너희 안에 있는 것을 열매 맺게 한다면,
그것이 너희를 구원할 것이니라.
너희 안에 그것을 가지지 않는다면,
너희가 가지지 않은 그것이
너희를 죽일 것이니라.
-예수(도마복음 70절)
내 안의 영혼(Spirit)을 자각(自覺, 스스로 깨달음) 하지 않을 때도, 영혼은 존재하고 있다. 그 자리에서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을 뿐이다. 때때로 멍을 때리거나, 사우나를 하거나, 혼자 걷고 뛰거나, 산꼭대기에 올라서 경치를 보거나, 춤을 추거나, 무엇인가에 고도로 몰입하여, 무아지경(無我之境)이 될 때, 마음의 작용이 꺼지고, 자신의 영혼을 느끼기도 한다. 그러나 인간 존재의 뿌리를 ‘알지 못하면’, 이내 다시 마음의 작용은 부산스러워지고, 먹구름이 낀 것과 같이 내면을 잊어버린다. 외부로만 시선이 향한다. 마음이 영혼과 정렬을 이루기 어려워진다. 외식(겉치레)하는 자가 된다. 긍정적인 기분을 유지하기가 어려워진다.
세계와 통하는 구멍을 활짝 열고
복잡한 일거리를 늘린다면,
죽을 때까지 구원받지 못할 것이다.
-노자(도덕경 52장)
무상(無常)한 ‘세상, 몸, 마음’만이 전부가 아님을 알고, 영원한, 의식하는, 내 안의 영혼(Spirit)을 자각하면, 그 자리가 다름 아닌, ‘하나님(I am)’의 자리임을 알게 된다. 무상(無常)한 ‘세상, 몸, 마음’ 일체가, 하나님의 작용인 것을 알게 된다. 마음에 의해 자각된 이 영혼을 ‘성스러운 영혼’(성령, Holy Spirit)이라고 한다. 와이파이가 켜지는 것과 같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Holy Spirit)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고린도전서 3:16~17>
그는 진리의 영(spirit)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기 때문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살고 있으며,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예수(요한복음 14:17)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영으로)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예수(요한복음 3:5~8)
예수에 따르면, 인생의 미션은 ‘성령(Holy Spirit)으로 거듭남(Born Again)’이다.
성령으로 거듭나기 전에는, 마음 작용의 방향이 몸과 세상으로만 향해 있다. 영혼은 잘 느껴지지 않는다. 내면의 빛이 느껴지지 않는다. 여기서, 몸을 향하는 마음을 욕심(欲心, 하고자 하는 마음)이라고 한다.
마음 작용의 방향이 내면으로 향하여 ‘참 나’를 자각하면, 성령으로 거듭난다. 내면의 빛이 느껴진다. 내면을 향하는 마음은 양심(良心, 선한 마음)이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거듭난 후의 마음 작용의 방향이 쌍방향이라는 점이다. 선한 마음만 있는 인간은 없다. 양심을 자각하게 되면, 욕심과 양심의 긴장과 대립으로 인한, 고뇌와 방황이 시작된다.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예수(마가복음 10:18)
욕심(欲心, 하고자 하는 마음)은 제거의 대상이 아니다. 욕심이 없으면, 어떠한 생명체도 생존할 수 없다. 식욕이 있어야 영양분을 섭취하고, 수면욕이 있어야 몸을 회복하며, 성욕이 있어야 번식이 가능하다. 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이는 몸의 세계가 있을 수 없다. 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이는 그 어떠한 위대한 성취도 있을 수 없다.
그렇다고 인간이 욕심만 있으면, 생존본능만으로 살아가는 짐승, 벌레와 다르지 않다. 인간이 짐승, 벌레와 다른 점은, 욕심뿐만이 아니라, 양심(良心, 선한 마음)도 함께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인간 안에는 신의 씨앗이 있다.
욕심이 대상으로 하는 모든 것은 무상(無常) 한 것이다. 유한한 것이다. 유한한 것만 존재한다면, 유한한 것에 마음껏 취해 살아도 될 것이다. 그러한 삶의 방식을 YOLO라고 한다. 그러나 문제는, 유한한 것 외에, 영원한 것이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성령이고, 신이다. 내면의 빛이고, 양심이며, 참나이다. 우리는 영원한 빛에서 왔고, 그 빛으로 다시 돌아갈 것이다. 그래서 사람이 죽으면 ‘돌아가셨다’고 한다.
완전한 비움에 이르십시오.
참된 고요를 지키십시오.
온갖 것 어울려 생겨날 때
나는 그들의 되돌아감을 눈여겨봅니다.
온갖 것 무성하게 뻗어 가나
결국 모두 그 뿌리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 뿌리로 돌아감은
고요를 찾음입니다.
이를 일러 제 명을 찾아감이라 합니다.
제 명을 찾아감이
영원한 것입니다.
영원한 것을 아는 것이
밝아짐입니다.
영원한 것을 알지 못하면
미망으로 재난을 당합니다.
영원한 것을 알면
너그러워집니다.
너그러워지면
공평해집니다.
공평해지면
왕같이 됩니다.
왕같이 되면
하늘같이 됩니다.
하늘같이 되면
도같이 됩니다.
도같이 되면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몸이 다하는 날까지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노자(도덕경 16장)
진실로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
주의 빛 안에서
우리가 빛을 보리이다.
<시편 36:9>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예수(요한복음 8:12)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둠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
-예수(요한복음 12:46)
내면의 빛은, 인간이 그것을 자각하든 안 하든, 그 자리에 있다. 그 자리에서 침묵하며,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다. 인간이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것은, 이 내면의 시선을 느끼기 때문이다. 이것은 마치 내면의 ‘판옵티콘’[1]과 같다. 인간 ‘실존 내면의 판옵티콘’은 개인이 스스로 마음을 통제(mind control)하게 만든다. ‘스스로 마음을 통제’할 수 있는 힘을 ‘자유의지’라고 한다. 자유의지를 가진 자만이, 자유로울 수 있다. 내면의 시선을 자각하여, 스스로 마음을 통제할 수 있는 자, 자유의지를 가진 자는, 노예가 아니다. 주인(主人, 왕인 사람)이다.
[1] 희랍어로 '모두'를 뜻하는 'pan'과 '본다'는 뜻의 'opticon'이 합성된 용어로, 영국의 공리주의 철학자 벤담이 창안한, 감옥의 형태다.
‘영혼의 지도’는 ‘과녁’에 비유될 수 있다. ‘과녁의 중심점’은 ‘나(I am)’라는 ‘실존의 자리’다. 이 자리는 깨어서 지켜보는 ‘주인의 자리’다. 이 자리에서 ‘자존감’이 나온다.
주인이
‘(종들이)깨어 있는 것(watching)’을 발견하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예수(누가복음 12:37)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
(Stay here and keep watch)
-예수(마가복음 14:34)
실존이 머물러 있어야 할 곳은, 깨어서 지켜보는 ‘과녁의 중심점’ 즉, ‘주인의 자리’다. 이곳에 빛이 있다. 이곳에서 벗어나 바깥 부분(몸, 마음)에 겉돌게 되면, 어둠에 갇히게 된다. 어둠에 갇히게 되는, 실존의 바깥 부분을, ‘죄인의 자리’라고 한다. 판옵티콘을 떠올려보자. 판옵티콘의 중심점에서 빛을 뿜는 자리는, 지켜보는 ‘주인의 자리’이고, 그 바깥 부분은, 어둠 속에서 감시를 당하는, ‘죄인의 자리’다.
‘죄’로 번역된 희랍어 ‘하마르티아(ἁμαρτία)’는, 궁술에서 쓰이는 말로서, 그 본래 의미는, ‘과녁을 빗나갔다’는 뜻이다. 즉 ‘죄’는 ‘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내면의 성장과정에서, 인간이라면 누구나 저지르게 되는, ‘실수’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 실수를 통해, 인간은 과녁의 중심점인, ‘나(I am)’라는 실존을 찾아가게 된다. 실존을 찾아가는 과정인, ‘인생’을 살아가는 모든 인간은, 이런 의미에서, ‘죄인’인 것이다.
즉, ‘죄인’은 ‘실수를 통해, 실존으로 건너가는 존재 양식’인, ‘인간’을 의미하는 것이다. 죄인에서 주인으로 거듭나려면, ‘내면의 지켜보는 눈’을 깨워야 한다. 내면의 지켜보는 눈이 바로, 내면의 빛인, ‘성령’이다.
God's plan, God's plan
신의 계획이야, 신의 계획이야
I can't do this on my own, ay, no, ay
난 이걸 내 혼자 힘으로 이룰 수 없어
Someone watchin' this shit close, yep, close
누군가가 나를 가까이서 지켜보고 있어
<Drake-God’s Plan>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것은, 내면의 빛인, 지켜보는 눈을 깨워서, 마음을 스스로 통제하여, ‘욕심’과 ‘양심’의 결합을 이루는 것이다. ‘자기만을 위하는 몸의 욕구’와, ‘모든 존재가 하나의 뿌리로 연결되어있다는 직관’이 결합하는 것이다. 욕심과 양심의 결합은, 모든 위대한 창조의 근원이다. 이 창조의 근원에 의해, 보이지 않는 손(Invisible hand)[2]이 작동한다.
[2] 애덤 스미스는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용어를 자신의 저서 [국부론]과 [도덕감정론]에서 사용했다. [국부론]은 이기심을 강조하고 [도덕감정론]은 동정심, 공감을 강조한다. 학자들은 양자 간의 모순을 ‘애덤 스미스 문제’로 불렀지만, 애덤 스미스 본인은 양자가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 결합될 수 있는 것으로 보았다. 자본주의의 폭발적인 성장의 철학적 배경은, 욕심과 양심의 결합에 있다. 이러한 철학적 배경을 무시하고 ‘보이지 않는 손’을 근거로 인간의 이기심만을 내세우게 되면, ‘천민자본주의’로 전락한다. 애덤 스미스는 자기 묘비명으로 “[도덕감정론]의 저자, 여기 잠들다.”라는 구절을 썼다.
‘욕심과 양심의 결합’을, ‘사랑’이라고 한다.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것은, 사랑을 할 수 있는 ‘개인’이 되는 것이다. 사랑은, ‘떼’가 아닌, ‘개인’이 할 수 있는 것이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예수(요한복음 13:34)
태초(胎初)에 ‘사랑’이 있었다. 모든 인간은 사랑에 의해 ‘창조’되었다. 모든 인간은 사랑을 받아서 ‘성장’될 수 있었다. 여기까지는, 인간이 육(몸)으로 태어나는 과정이다. ‘육’으로 태어나는 과정에서 인간은, 수동적인 존재다.
‘영’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은, 개인 ‘내면’의 힘의 축적과 결단이 필요하다. 영으로 태어나는 몸부림을 시작하는 순간부터, 즉 자기 내면을 탐구하는 순간부터, 인간은 능동적인 존재로 거듭난다. 성령으로 거듭나는 ‘개인’은-
-
사랑을 받는 존재에서, 사랑-하는 존재로 거듭난다.
-
창조된 존재에서, 창조-하는 존재로 거듭난다.
-
보살핌에 의해 성장되는 존재에서, 스스로 성장-하는 존재로 거듭난다.
그런즉 ‘사랑, 창조, 성장’은 개인의 미션인데, 그중의 제일은 사랑이다. 사랑할 수 있는 개인만이, 새로운 것을 창조할 수 있다. 사랑할 수 있는 개인만이, 자기 자신을 극복하고 끊임없이 성장할 수 있다. 사랑할 수 있는 개인만이, 용서할 수 있다. 사랑할 수 있는 개인만이, 운명(자기의 십자가)을 사랑(amor fati)할 수 있다. 사랑할 수 있는 개인만이, 나의 행복과 남의 행복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님을 안다. 사랑할 수 있는 개인만이, 남의 고통과 나의 고통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님을 안다. 사랑을 할 수 있는 개인만이, 인간(人間)이 하나의 뿌리로 연결된, 관계적 존재임을 안다. 사랑할 수 있는 개인만이,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는 것(弘益人間)이, 자기 자신을 이롭게 하는 것임을 안다. 지금까지의 복잡한 논의는 모두 사랑으로 귀결된다. 사랑이 답이다. 사랑은 야성(野性)과 신성(神性)의 결합이다.
우리는 어디서 태어났는가?
사랑에서
우리는 왜 쇠멸하는가?
사랑이 없으므로
우리는 어떻게 자신을 극복하는가?
사랑으로
어떻게 오랜 세월 울지 않고 지낼 수 있는가?
사랑이 있기에
우리를 끊임없이 이어주는 것은 무엇인가?
사랑
-괴테
Home
제대로 돌아왔어
hold on
잠깐 멈춰봐
If love is the answer, you're home
‘사랑’이 그 대답이라면,
너는 제대로 돌아왔어
<Daft Punk –Touch>
미워하는, 미워하는, 미워하는,
마음 없이
아낌없이, 아낌없이,
사랑을 주기만 할 때
수 백만 송이, 백만 송이,
백만 송이 꽃은 피고
그립고 아름다운 내 별나라로
갈 수 있다네
<심수봉–백만 송이 장미>
'✒️골방인디출판 > 예수 컨설팅-포스트꼰대니즘의 전도'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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