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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방인디출판/노자 컨설팅-포스트꼰대니즘의 도

노자 컨설팅-제4장 카탈락시

by 마음의제국 2020. 4. 30.


천하를 차지하기 위해서 무엇인가를 하는데,

나는 그것이 뜻대로 되지 않음을 볼뿐이다.

 

천하는 신령스러운 기물이어서,

의지가 개입된 행위로 

무엇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강한 의지로 하려는 자는 그것을 망칠 것이고,

꽉 잡고 놓지 않으려는 자는 그것을 잃을 것이다.

 

 

원래 세상의 사물에는 

앞서는 것이 있는가 하면

뒤따르는 것이 있고,

따뜻한 온기로 감싸 주는 것이 있는가 하면

찬 기운을 내뿜는 것도 있다.

 

어떤 것은 강하지만

또 어떤 것은 유약하다.

솟아나는 것이 있는가 하면

무너지는 것도 있다.

 

이 때문에 성인은

극단적으로 하거나 

사치하거나

지나치게 하지를 않는다.

 

-도덕경 스물 아홉째 장


1974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프리드리히 하이에크는 외부 간섭이 없이 스스로 조정되는 질서인 

자생적 질서를 강조하였다. 자생적 질서의 반대편에는 ‘인위적 질서’가 있다. 

인위적 질서는 인간의 이성이 완벽하다는 가정에서 출발한다. 

이러한 가정은 인간이 합리적으로 완벽한 사회 모델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생각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생각은 인간의 이성을 통한 설계인 ‘계획’ 패러다임으로 이어진다. 

하이에크는 경제 전체를 계획하려는 사상적 흐름이 독일에서는 나치를, 

소련에서는 스탈린주의를 등장하게 하였다는 점을 직시하였다. 

그래서 계획이라는 인위적 질서의 길이 독재와 노예로 가는 길임을 밝히기 위해

《노예의 길》(Road to Serfdom)이라는 책을 썼다.

 

하이에크는 서로 다른 가치체계를 가진 개인들이 서로에게 필요한 물건과 서비스를 주고받는

자율적인 시장경제를 ‘카탈 락시(Catallaxy)’라고 명명하고, 이를 ‘경제(Economy)’라는 개념과 구분한다. 

우리에게 익숙한 경제(Economy)는 그 어원상 가장에 의한 가족 경영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이것은 계획이 포함된 개념이다. 

계획 패러다임은 필연적으로 소수 엘리트에 의한 지배로 귀결된다는 것은, 역사가 증명한다. 

 

반면, ‘카탈 락시’는 그 어원상 적을 친구로 만들다는 뜻을 담고 있다. 

이것은 서로 다른 가치를 가진 사람들이 공존하는 체제를 의미한다. 

하이에크는 인위적 질서인 계획이 아닌, 자생적 질서인 시장 가격 시스템을 긍정한다. 

개인은 제한된 지식만을 가지고 불완전한 판단을 하는 존재이다. 

서로 다른 가치와 욕구를 가진 존재이다. 이러한 개인들을 하나의 계획으로 묶어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카탈 락시에서는 다양한 개인들이 상호조정(Mutual Adjustment)을 하면서

자생적 질서가 이루어질 수 있다고 하이에크는 주장한다.

 

소련의 붕괴로 냉전은 종식되었다. 

정치 경제라는 거시적 영역에서는 이미 자생적 질서가 인위적 질서를 이긴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하이에크가 필요한 이유는

아직 미시적 영역에서 자생적 질서가 깊게 뿌리내리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이에크의 철학은 사회주의를 비판하는 차원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문화적 진화를 통한 끊임없는 변화 자유를 이야기하고 있다. 

자유의 문제는 이념과 체제의 문제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생활을 둘러싼 모든 사회 시스템에 관련되어 있다.

 

한국 특유의 집단주의적 조직문화는 인위적 질서에서 기인한다.  

인위(人爲)의 길을 제시하였던 공자의 영향이 크다. 

재벌이라는 한국 특유의 기업 지배구조 역시

회장이라는 본질, 사원이라는 본질이 있다고 생각하는, 본질론적 사고관에서 기인한다.     

인위적인 질서 아래에서는 이성적인 소수 엘리트가 구성한 계획에 따라 모든 개인들이 통제되어야 한다. 

다양한 개인들이 가지고 있는 고유의 가치와 욕구는 위험하고 불순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제 인위(人爲)의 반대 길인 무위(無爲)의 길을 제시하였던 노자의 목소리를 들어보자.

 


텅 빈 상태를 유지해야 오래가고,

중(中)을 지켜야 돈독해진다.

만물이 다 함께 번성하는데,

나는 그것을 통해 되돌아가는 이치를 본다.

만물은 무성하지만, 각각 자신의 뿌리로 돌아간다.

뿌리로 돌아가는 것을 일러 고요함(靜)이라 하는데,

밝음(明)을 회복한다는 말이다.

밝음을 회복하는 것을 늘 그러한 이치라 하고,

늘 그러한 이치를 아는 것을 밝음이라 한다.

늘 그러한 이치를 알지 못하면,

제멋대로 나쁜 일을 하게 된다.

늘 그러한 이치를 알면 포용하게 되고,

포용력이 있으면 공평하게 되며,

공평할 줄 알면 왕 노릇을 할 수 있다.

왕 노릇을 하는 일은 곧 하늘에 부합하는 것이며,

하늘에 부합하는 일이 곧 자연의 이치이다.

자연의 이치대로 하면 오래갈 수 있으며,

죽을 때까지 위태롭지 않다.

 

- 도덕경 열여섯째 장


‘텅 빈 상태를 유지해야 오래가고, 중(中)을 지켜야 돈독해진다. 

만물이 다 함께 번성하는데, 나는 그것을 통해 되돌아가는 이치를 본다.’

 

=> 노자는 ‘도(道)는 텅 비어 있다’고 한다(도덕경 넷째 장). 

텅 빈 상태를 유지해야 오래간다는 것은, 도를 유지해야 지속 가능하다는 것이다. 

도는 대립되는 면이 긴장을 유지하며 공존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의 계획으로 묶이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개인들이 상호 조정하는 카탈 락시의 상태를 유지해야 오래 갈 수 있다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다. 

‘중(中)을 지켜야 돈독해진다’는 부분은, 시장 가격 시스템에 의한 균형(equilibrium)과 의미가 통한다. 

시장은 수요와 공급이라는 대립쌍이 공존한다. 균형은 이러한 대립쌍이 조화를 이루는 지점이고,

이것은 다양한 개인들의 상호작용에 의해 자생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특정 집단의 계획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다른 가치들이 공존하며 ‘적을 친구로 만드는’ 카탈락시의 상태이다. 

자생적 질서를 갖추어야 만물이 다 함께 번성할 수 있다는 이야기는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과 통한다. 

국부론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일반적으로 말하면, 분명히 개인은 공공의 이익을 의도적(=인위, 계획)으로 증진시키려고 하지는 않으며, 얼마나 증진시키고 있는지 알지도 못한다. 외국 산업보다 국내 산업에 대한 지원을 선호하는 것은 그들 자신의 안위만을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이며, 그 산업을 운영하는 것도 자기 자신만의 이득을 염두에 두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른 많은 경우와 같이, 개인은 바로 그때 보이지 않는 손(=무위, 자생적 질서)에 이끌려 자신이 의도치 않았던 목표를 달성하게 된다. 의도치 않았다고 해서 사회에 나쁜 영향을 끼치는 것만은 아니다. 사회의 이익을 의도적으로 증진(=인위)시키려 할 때 보다,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함(=무위)으로써 개인은 더 자주, 더 효율적으로 사회의 이익을 증진시킬 수 있다.(=’ 적을 친구로 만들다’, 카탈 락시) 나는 공공 이익을 위해 거래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인위를 주장하는 사람들, 이성으로 이상을 만들 수 있다고 믿는 자들)이 진짜로 크게 이익이 되는 경우를 들어보지 못했다. 그런 이야기는 상인들 사이에선 흔치 않다. 그리고 그러지 말라고 그들을 설득하는 것은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니다.”


 

‘만물은 무성하지만, 제각각 자신의 뿌리로 돌아간다.

뿌리로 돌아가는 것을 일러 고요함이라 하는데, 밝음을 회복한다는 말이다.’

 

=> 인위적 질서에 의해 하나의 보편적 가치로 묶여 있던 개인이 본래의 고유성을 회복하는 것을 말한다. 

교육과 조직 사회화 등으로  끊임없이 외부의 기준을 채우고 또 채우는 것에서, 

비우고 또 비우는 과정을 거쳐 세상에서 유일한 존재인 본래의 나 자신으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나 자신의 욕구와 가치가 긍정되고 자신만의 삶의 방식과 리듬을 따르게 되면

더 이상 비교하고 불안해할 필요가 없이 ‘지금 여기’의 삶에 집중할 수 있게 된다. 

 

‘밝음을 회복하는 것을 늘 그러한 이치라 하고, 늘 그러한 이치를 아는 것을 밝음(明)이라 한다. 

늘 그러한 이치를 알지 못하면, 제멋대로 나쁜 일을 하게 된다.’

 

=> 자연스러운 상태를 벗어나 인위적으로 무엇인가를 도모하는 것을 비판하고 있다. 

여기서 ‘明’ 자는 해와 달이 함께 있는 모양이다. 

해만 보거나 달만 보는 것이 아니라 양자를 통합적으로 다 볼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러한 밝음을 잃게 되면 한쪽으로 치우치게 된다. 

사회를 하나의 가치로 통일시켜 인위적으로 무엇인가를 도모했던 시도들은, 

그 대의가 아무리 훌륭하고 합리적으로 보인다고 하여도 모두 비극으로 끝이 났다는 것을,

역사는 증명한다. 

그래서 노자는, 

‘성인이 하는 정치는 저 지혜롭다고 하는 자들로 하여금 감히 무엇을 하려고 하지 못하게 한다. 

무위를 실천하면 다스려지지 않는 것이 없다’고 이야기한다(도덕경 셋째 장).

 

‘늘 그러한 이치를 알면 포용하게 되고, 포용력이 있으면 공평하게 되며, 

공평할 줄 알면 왕 노릇을 할 수 있다. 왕 노릇을 하는 일은 곧 하늘에 부합하는 것이며, 

하늘에 부합하는 일이 곧 자연의 이치이다. 자연의 이치대로 하면 오래갈 수 있으며, 

죽을 때까지 위태롭지 않다.’

 

=>늘 그러한 이치란 도이다. 도를 알면 자신의 이성을 믿고 함부로 보편적인 기준을 앞세우지 않으며, 

대립쌍이 공존하는 복잡하고 모호한 세계를 있는 그대로 포용할 수 있게 된다. 

리더는 자신의 뜻대로 다른 사람들을 통제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생적 질서가 더 강하다는 것을 알고, 구성원들의 개별성을 살려주어

상호 조정하는 창발적 생태계를 구축할 수 있는 사람이다.

 

 

 

<요약>

  1.  거시 영역의 자유주의는 승리하였지만, 미시 영역의 자유주의는 아직 미미하다.

  2.  미시영역의 자유주의가 미미하기 때문에 개인의 개별성 보다 집단의 보편적 기준이 우선시된다.

  3.  인위적 질서는 노예의 길이고, 자생적 질서는 자유의 길이다.

  4.  조직은 자생적 질서를 구축해야 지속 가능한 경쟁우위 창출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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