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예들의, 주인에 대한 질투심을, 르상티망(ressentiment)이라고 한다. ‘집단적 나르시시즘’은 ‘르상티망’을 뿌리로 하여 자라난 열매다.
‘나르시시즘’은, 그리스 신화에서, 호수에 비친 자기 모습을 사랑하며 그리워하다가, 물에 빠져 죽어 수선화가 된, ‘나르키소스’라는 미소년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 혼자서는 삶의 기쁨을 누릴 수 있을 만큼 용감하지 못한 자들이, 서로에게 도피하여 용해되어버린, ‘군중-떼’ 차원에서의 나르시시즘, 이것이 ‘집단적 나르시시즘’이다.
예수의 삶은 ‘유대인들의 집단적 나르시시즘’이라는 맥락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구약적 세계관'은, ‘유대인들의 집단적 나르시시즘’의 총체다. 구약 속의 여호와(야훼)는, 유대인들의 집단적 에고의 형상을 따라 만들어진 ‘인격신’이다. 이 인격신은, 유대인들의 집단적 나르시시즘이 잘 반영되어 있는, 질투하는 신이다.
네 하나님 여호와는 소멸하는 불이시요,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니라.
-신명기 4:24
신이 어디로 갔느냐고?
너희에게 그것을 말해 주겠노라!
우리가 신을 죽였다-너희들과 내가!
우리 모두가 신을 죽인 살인자다!
하지만 어떻게 우리가 이런 일을 저질렀을까?
<니체-즐거운 학문>
신 개념은 왜곡되어버렸다.
도덕 개념도 왜곡되었다.
– 유대의 사제들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들은 일체의 전승과
일체의 역사적 현실에 대해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경멸감을 품으면서
자기네 민족의 과거를
종교적인 것으로 번역해버렸다.
다시 말해 그들은 그것을
야훼에 대한 죄와 이에 대한 벌,
야훼에 대한 경건함과 이에 대한 보상이라는
어리석은 구원의 메커니즘으로 만들어버렸다.
<니체-안티크리스트>
신은 죽었다!
신은 죽어버렸다!
우리가 신을 죽인 것이다.
살인자 중의 살인자인 우리는
이제 어디에서 위로를 얻을 것인가?
<니체-즐거운 학문>
신에 대한 불복종,
다시 말해 사제에 대한,
(구약)‘율법’에 대한 불복종은 이제
‘죄’라고 불리게 된다.
……죄는 권력의 진정한 지렛대이며,
사제는 죄에 의지해 살고
사람들이 ‘죄짓는 것’을 필요로 한다. …….
최고의 법: ‘하나님은 참회하는 자를 용서하신다.’
– 그것은 쉽게 말하면
사제에게 복종하는 자를 용서한다는 것이다.
<니체-안티크리스트>
납득이 되지 않는 고통 속에 빠진 유대인들에게, 구약과 율법을 절대시 하는 유대교 사제들은, 납득이 되는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우리를 닮은 질투하는 신, 복수하는 신, 그가 우리를 구원해 주신다. 우리는 신에게 선택된 민족이다. 여호와를 섬기는 우리만 구원받는다(선민의식). 메시아가 나타나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고, 적들을 심판(복수)한다.'-
보라, 너희 하나님이 오사,
보복하시며 갚아 주실 것이라.
하나님이 오사, 너희를 구하시리라.
-이사야35:4
납득당한 유대인들은 ‘군중-떼’가 된다. 그들의 패배, 고통, 역경은, 그들의 힘으로 극복되지 못하고 방치된 채, ‘군중-떼’는 서로에게로 도피한다. 메시아가 오기만을 기다린다. 심판과 종말 뒤로 도피한다. 이것을 ‘유대인들의 집단적 나르시시즘’이라고 한다.
‘유대인들의 집단적 나르시시즘’이라는 ‘맥락’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예수가 나타났다. 예수는 ‘유대인들의 집단적 나르시시즘’을, 망치를 들고 부숴버린다.
첫째, 예수는 인간을 ‘군중-떼’, ‘노예’로 전락시키는 지렛대인 ‘죄책감’, ‘두려움’을 파괴한다.
작은 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예수(마태복음 9:2)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예수(요한복음 16:33)
둘째, 예수는 편협한 선민의식을 파괴하고, 사해동포주의로 전환시킨다.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예수(마가복음 12:31)
셋째, 예수는 군중-떼를 결속시키기 위한 장치로서의 외부의 적과, 그에 대한 미움, 질투, 복수심을 파괴한다.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예수(마태복음 5:39)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예수(마태복음 5:44)
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
-예수(누가복음 6:36)
‘예수의 복음’이 만민에게 전파되는 것이 아니라, 그 정반대인 ‘집단적 나르시시즘’이 전파되고 있다. 이분법적 혐오, 대립을 조장하여, ‘군중-떼를 모으는 모든 것들’이, ‘집단적 나르시시즘’이다. 그리고 ‘집단적 나르시시즘’을 전파하는 자들이 곧, ‘적-그리스도(Anti-christ)’다. 왜냐하면, 예수는 ‘집단적 나르시시즘’을 전복하는, ‘의식혁명’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이 혁명의 본질을 은폐하고, 교묘하게, ‘집단적 나르시시즘’을 전파하는 자들이, ‘적그리스도’다.
집단적 나르시시즘의 요건은 다음과 같다.
-
사람들의 두려움과 불안, 죄책감을 자극하여, ‘군중-떼’를 모은다. (↔안심, 죄사함, 평안, 담대함, 자유)
-
선민의식(우리만 옳다)에 취하게 한다. (↔사해동포주의, 이웃사랑)
-
결속을 위해 외부의 적을 상정한 뒤, 혐오와 대립을 부추긴다. (↔자비, 사랑)
‘집단적 나르시시즘’을 전복하고, 군중-떼를 자유롭게 만들었기 때문에, 예수는, ‘종교권력(구약성경, 즉 유대교 경전을 절대시 하는 성직자들)’과 ‘정치권력(로마제국의 식민지배)’의 ‘공동의 적’이 된다.
빌라도(유대 주재 로마 제5대 총독)가 예수를 놓으려고 힘썼으나,
유대인들이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을 놓으면 카이사르(로마 황제)의 충신이 아니니이다!
무릇 자기를 왕이라 하는 자는 카이사르를 반역하는 것이니이다!”
빌라도가 이 말을 듣고,
예수를 끌고 나가서 돌을 깐 뜰에 있는 재판석에 앉아 있더라.
이 날은 유월절의 준비일이요, 때는 제육시라.
빌라도가 유대인들에게 이르되,
“보라 너희 왕이로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소리 지르되,
“그를 제거 하소서! 그를 제거 하소서!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빌라도가 이르되, “내가 너희 왕을 십자가에 못 박으랴?”
성직자의 우두머리들이 대답하되,
“카이사르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 하니,
이에 빌라도는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도록 그들에게 넘겨 주니라.
-요한복음 19:12~16
‘두려움’과 ‘죄책감’에 떠는 노예들을, 주인으로 사는 자유로운 개인으로 각성시키는 가르침은, ‘위계’를 무너뜨린다. 군중-떼를 먹이로 생존하고 성장하는, 위계에 ‘기생’하는 자들은, 그래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 십자가라는 ‘사형 틀’을 사람들에게 보여, 그들을 다시 ‘두려움’과 ‘죄’의, ‘노예’로 전락시키기 위해서이다.
그는 권력자들과 권위자들을 무력화하고,
그들의 실체를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다.
<골로새서 2:15>
정신의학에 의하면, ‘B형 인격장애’에 속하는 것이, ‘자기애성 인격장애(narcissistic personality disorder)’다. 자신에 대한 과장된 평가, 인정받고 싶은 욕구, 다른 사람에 대한 공감의 결여를 특징으로 하는 ‘인격 장애자’가, ‘나르시시스트(narcissist)’다.
이것에 대한 정신 병리의 핵심은 ‘자존감(self-esteem)’과 관련된 갈등과 결함이다. 여기서 ‘자존감’이란, 자신의 존엄성이, 외부의 인정이나 칭찬에 의한 것이 아니라, 자신 내부의 성숙된 사고와 가치에 의하여 얻어지는, 개인의 의식을 말한다.
즉, 나르시시스트들은, 내면이 성숙하지 못해서, ‘자존감’이 낮고, 의식 수준이 ‘수치심’, ‘죄책감’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이다. 이것을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내면의 ‘성장’이 있어야 하지만, 이들은 그러한 의지가 없다. 오히려 이것을 거꾸로 뒤집어, 외적인 것에 대한 ‘집착’을 보인다. 겉치레, 지위, 자격, 간판, 스펙 등에 집착하며, 외적인 것에 대한 성취를 통해, 자기 내면의 빈약함을 가려버리고, 타인을 자기 아래에 두어 갑질 하면서, 심리적으로 ‘자기 방어’를 한다.
이들은 수치심과 죄책감에 의해 ‘자기혐오’에 빠지며, 이러한 ‘부정적인 감정’을 해소하기 위해, 자기의 수치심과 죄책감을, 다른 선량한 사람들에게 투사(projection)하여, 그 사람들이 오히려 수치심과 죄책감에 빠지도록 조종한다.
이들은 타인에 대해서는 ‘이상화’(빠-짓)와 ‘평가절하’(까-짓)의 양극단을 번갈아 가지게 되며, 자신에 대해서는 ‘우월감’과 ‘열등감’을 번갈아 가지게 된다. 이들은 내면의 중심(中心)이 확고하지 않기 때문에, 흑백 논리와 이분법으로 세상을 본다.
여기서 ‘열등감’이라는 것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일정 부분 가지고 있는 감정이다. 적절한 열등감은, 성장의 필요조건이기도 하다. 문제는 ‘열등감 콤플렉스’다. ‘열등감 콤플렉스’는 ‘불완전성’이라는, 생성하는 존재의 실존 양식을 거부하고, ‘완전성’이라는, 환상에 사로잡히는 것에서 비롯된다. ‘생성으로부터의 도피’의 결과가, ‘열등감 콤플렉스’ 및 ‘과도한 우월감’이다. ‘완전성’이야말로 ‘생성’의 ‘반대-극’이다. 생성에 불구가 된 자들은, 옛 것을 그대로 지키는데(수구, 守舊) 집착하게 된다. 생성에 불구가 된 자들은, 오로지 옛 것에 의해서만 자신의 존재감을 느낄 수 있기 때문에, ‘생성하는 존재들’을 두려워하고, 질투한다. ‘생성에의 의지’가 거세된 나약한 나르시시스트는, ‘불완전성’이라는 ‘자연성’을, ‘인위적 자아도취’라는 ‘환상’으로 덮어버린다. 환상 속에 머물며, 끊임없이 꾸며대고 겉치레를 하지만, 깊은 내면의 열등감은 숨길 수가 없다. 끊임없이 겉치레해야만 하는 ‘자존감 낮은’ 나르시시스트는, 모든 것이 거짓 위선이지만, 이따금 본심을 숨기지 못하고, “자괴감 든다”라는 말을 내뱉게 되는데, 이 말만은 진실로 진실로 진실되다. 성장과 창조로 이어지는 씨앗인, 불완전성을, 인위적으로 제거하고, 눈속임하면, 그 필연적 귀결은, ‘정체’, ‘도태’, ‘멸망’이다.
이 사람들은 본래 잡혀 죽기 위하여 난 이성 없는 짐승 같아서,
그 알지 못하는 것을 비방하고
그들의 멸망 가운데서 멸망을 당하느니라.
<베드로후서 2:12>
나르시시스트들은 ‘나(I am)’라는 실존이 텅 비어 있어서, ‘나’와 ‘타인’의 경계를 알지 못한다. 실존에 대한 공허감 때문에, 마치 속이 시커먼 블랙홀처럼, 타인을 게걸스럽게 집어삼킨다. 타인의 독립된 ‘자유의지’를 인정하지 않는다. 무례하게 타인의 영역을 침범한다. 타인의 감정은 전혀 상관하지 않고,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타인을 이용한다. 인간을 ‘수단화’, ‘대상화’, ‘사물화’하는 것은, 이들에게는 상식이다.
이들은 ‘자신과 타인’(인간)에 대한, 사랑과 존경이 없다. ‘특권의식’은 강하면서, 동시에 ‘공감 능력’은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타인을 ‘통제’하고, ‘조종’하고 , ‘착취’한다. 그리고 자신에 대한 과도한 숭배를 요구한다. 이 정신병자들이 사회의 주도권을 잡으면, ‘권위주의적 꼰대니즘 사회’가 된다.
상하 관계 예의는 엄격하게 따지면서도
상호 관계 에티켓은 개나 줘버린 이들을
꼰대라 한다.
<김수현-나는 나로 살기로 했다>
<나르시시스트 식별 도표>
극 |
중심(中心) |
극 |
열등감 |
자존감 |
우월감 |
굴종 |
자유+책임 |
방종 |
마조히즘 |
사랑 |
사디즘 |
낙타의 정신 |
아이의 정신 |
사자의 정신 |
노예의 삶 |
주인의 삶 |
진상 꼰대의 삶 |
*중심을 잃은 사람은, 극과 극을 시계추처럼 흔들린다. 극과 극은 하나로 통한다. 극과 극을 시계추처럼 흔들리는 것의 징표는, ‘강한 자에게는 약하게, 약한 자에게는 강하게 구는 행동양식(강약약강)’을 보인다는 것이다. 중심을 잃고, 극과 극으로 천박(舛駁 : 뒤섞여서 고르지 못하거나, 어수선하여 바르지 못함)하게 흔들리는 사람이 나르시시스트다.
이 정신병의 주요한 원인은, ‘애정 결핍’이다. 애정 결핍이 시스템화 되어 있는 사회는, ‘나르시시스트 대량생산 시스템’이다. 이 시스템의 동력은, ‘구분’, ‘편애’, ‘차별’이다. ‘나르시시스트 대량생산 시스템’의 대표적인 예로는, 대한민국의 ‘입시학교’를 들 수 있다.
하늘과 땅은 편애하지 않는다.
성인도 편애하지 않는다.
-노자
너희가 만일 너희를 사랑하는 자만을 사랑하면,
칭찬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사랑하는 자는 사랑하느니라.
너희가 만일 선대 하는 자만을 선대 하면,
칭찬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이렇게 하느니라.
너희가 받기를 바라고 사람들에게 꾸어 주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그만큼 받고자 하여, 죄인에게 꾸어 주느니라.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 하며,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하시니라.
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
-예수(누가복음 6:32~36)
‘나르시시스트 대량생산 시스템’을, ‘가족’이라는 미시적 차원에서 분석해 보면, ‘아들, 딸의 구분(남아선호 사상)’과 ‘학업성적 등, 외부적 성취에 따른 조건적이고 차별적인 사랑’이, 그 틀 안에서 승자에 속하던, 패자에 속하던, ‘모든 아이들’을, ‘배제와 박탈’의 ‘불안과 두려움’으로 몰아간다. 이로 인해 이들의 내면 속에는 ‘수치심’과 ‘죄책감’이 자라나게 되며, 그 결과 나르시시스트가 양산된다.
가족은 본래 ‘무조건적 사랑의 집합체’다. ‘무조건적 사랑’이라는 것은, 방종을 방임하는 것이 아니다. ‘자유와 책임’이 ‘하나’라는 것을 인식시키고, 그 인식의 확고한 기반 위에서, 존재 자체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다. 어떤 조건이 성취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 그 자체’로 사랑받는다는 것을, 충분히 느낄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다. ‘무조건적 사랑의 집합체’가 병들어, ‘조건적 편애의 집합체’가 되면, 그 안에서 존재에 대한 공감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자라난 아이들이, 나르시시스트로 자라난다. 이들은 ‘조건’을 따지는 ‘편애’만 할 수 있다. 이들이 가정을 꾸리면, 그곳 역시 ‘나르시시스트 양성소’가 된다.
대도(大道)가 폐하면
인(仁)이니 의(義)니 하는 것이 나서고,
지략이니 지모니 하는 것이 설치면
엄청난 위선이 만연하게 된다.
가족 관계가 조화롭지 못하면
효(孝)니 자(慈)니 하는 것이 나서고,
나라가 어지러워지면
충신이 생겨난다.
-노자
‘나르시시스트 대량생산 시스템’을, ‘사회’라는 거시적 차원에서 분석해 보면, ‘선별적 기준’이 강하게 작동하고, ‘권력 격차’가 크며, ‘집단주의 성향, 결과 중심주의 성향’이 강한 사회일수록, 나르시시트를 효율적으로 양산해낸다.
‘선별적 기준’이 강하게 작동한다는 것은, 사람을 ‘차별’하는 ‘인위적인 기준’을, 의심하지 않고, ‘절대시’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구분하는 것은, ‘입사시험 성적’이라는 ‘기준’이다. ‘입사 전’에 치러지는 입사 시험의 성적이, ‘입사 후’의 직무수행성과를 얼마나 정확히 예측할 수 있는지(타당성 검증), 그 시험의 측정 결과에 ‘일관성’과 ‘안정성’이 있는지(신뢰성 검증), 등에 대한 철저한 분석은 이루어지지 않은 채, 입사시험 결과만으로,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 임금, 복리후생 등에 대한 ‘차별’이 발생하는 것을, ‘당연한 것’이라고 ‘절대시’하는 것이, ‘선별적 기준’이 강하게 작동하는 모습이다. ‘선별적 기준’은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인위적’인 것이기 때문에, ‘복잡한 형식과 절차’를 수반하게 된다. 선별적 기준이 강하게 작동하면, ‘실리(實利)’보다, ‘형식과 절차’를 더 중요시 여기게 된다.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너희가 가졌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
<야고보서2:1>
사람을 차별하는 기준을 의심하지 않고 절대시 하면, ‘권력 격차’가 커진다. 권력 격차의 전제조건인, ‘기준’이 ‘절대시’되기 때문에, 그에 따른 결과인, ‘갑질’이 ‘당연시’ 된다. 사람 사이의 ‘관계’는 실종되고, ‘위계’가 ‘사회생활’을 정의하게 된다. 관계의 빈약함을, 위계라는 껍데기로 치장한 사회를 ‘집단주의 사회’라고 한다.
‘껍데기’만 남은 집단주의 사회는, ‘결과’라는 눈에 보이는 ‘껍데기’만 볼 수 있기 때문에, 수많은 우여곡절과 실패를 수반하는, ‘과정’을 견뎌내지 못한다. ‘결과만을 절대시’ 한다. ‘결과만을 절대시 하는 사회’는, ‘과정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자기혐오’를 부추긴다. 사회 전체에 ‘불행’(不幸: 행복하지 않음 +不行: 행동하지 않음, 행동은 과정-그 자체다.)을 전염시킨다. 이것을 ‘성급한 결과화의 오류’라고 한다.
‘삶’ 자체가 ‘과정’이고, ‘그 결과’는 ‘죽음’이다. ‘과정’은, 완성되지 않고, 모호하여, ‘성장과 창조’로 끊임없이 나아가는 ‘운동 상태’를 말한다. ‘성장과 창조’는, ‘과정’이라는 ‘모호함’에 머물 수 있는 자들의 것이다. 모호함을 견디지 못하고, 결과에만 집착하여, ‘성장과 창조’라는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사회를, ‘권위주의적 꼰대니즘 사회’라고 한다. ‘결과(結果)’는 ‘열매를 맺음’이라는 뜻인데, 눈에 보이는 결과에만 집착하는 ‘꼰대니즘 사회’는 역설적으로, 열매를 맺지 못한다.
이러한 사회의 전형이 ‘조선’이다. ‘조선인들의 집단적 나르시시즘’은, 치유된 적이 없는 정신병이다.
이 정신병의 주요 원인인 ‘애정 결핍’은, ‘사랑의 부재’를 의미한다. ‘집단적 나르시시즘’을 치유할 수 있는 유일한 길(道)은, ‘사랑의 회복’이다.
조선인들은 ‘사랑’을, ‘정(情)’이라고 불렀다. ‘조선인들의 집단적 나르시시즘’을 치유할 수 있는 유일한 길(道)은, ‘정(情)의 회복’이다.
*情 : 靑(젊다, ↔꼰대)에 心(마음, 중심)이 합쳐진 글자가 情(정)이다. 즉, 인간 ‘본성’이 지닌 본래의 맑고 청정한 마음을 상징하는 글자가 情(정)이다. ‘사랑, 인정, 본성, 멋, 뜻, 진리, 참마음’ 등의 의미가 있다.
서로 사랑하라.
-예수(요한복음 13:34)
미쳤지.
그러나 이게 세상이 돌아가는 모습이야.
수많은 사람들이 서로 적이 되어 살아가고 있어.
하지만 아직은,
사랑하는 방법을 배우기에,
늦은 것이 아닐지도 몰라.
혐오하는 방법 따위는 잊어버리자.
정신병은 치유되지 않았어.
이 상태로라면 삶은 쓰디쓴 치욕이지.
난 이 미친 기차에서 뛰어내릴 거야!
<Ozzy Osbourne-Crazy Train>
'✒️골방인디출판 > 예수 컨설팅-포스트꼰대니즘의 전도'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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